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맑음
김병상 신부님을 지난 해 여름쯤 뵈었나, 아니면 봄쯤? 겨울일 수도 있고… 진주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 모임에 함신부님이랑 오셨는데 ‘이젠 기억이 앞뒤가 섞이다 보면 시간도 때도 간곳을 모르겠다’고 탄식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신부님 말씀이 유난히 어눌해 보였고, 올 봄에는 안 좋으시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차일피일 시간은 흘렀고, 지난 여름에는 기어이 뇌졸중으로 입원하셨다는데 면회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보스코가 김병상 신부님의 출판기념회가 오늘 있다면서 가자고 했다. 「따뜻한 동행」! 그분을 아는 사람은 대부분이 그분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함신부님도 축하미사 강론에서 “나는 호불호를 가려 사람을 사귀는데 김신부님은 한나라당 인간들도 다 만나주시고, 내가 교회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이 좀 심하다 싶으면 ‘너무 그러지마. 우리가 거기서 밥 얻어 먹고살잖아?’라고 싸안아주는 여유가 있었다.”고 회고하셨다. 누구라도 안아주실 만큼 따뜻하고 넉넉한 품을 가진 분이시다.
오늘 출판기념회를 해도 얼굴이나 한번 보여주실까 했는데 보스코도 나도 알아보시고, 행사 후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하셔서 행사에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차리셨다. 행사 중 사람들의 얘기에 벌떡 일어나 놀라게도 하셨고, 박수로 화답도 하셨다. 사경에서 비롯하여 그만큼 소생하신 데 모든 지인들이 놀랐다.
김병상 몬시뇰은 1932년 충남 공주 요골공소라는 교우촌에서 태어나셨다. 당신의 어눌한 답사대로 어머니의 기도와 순교자들의 이끄심이 어려운 중에도 그분을 사제가 되게 했단다. 1948년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폐결핵으로 중단했다가 1963년에 다시 대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당신 조카랑, 그리고 보스코랑 한반으로 공부를 하셨다. 1969년 12월 13일에 드뎌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연을 맺은 수녀님들, 선후배신부님들, 사목하셨던 다섯 개 본당 신자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 그분이 이사장 등을 역임하신 기관의 사람들, 그밖에 사회의 어려운 곳에서 그분이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분을 찾아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건데 신부님이 참 잘 살아온 분임을 알겠다. 우리가 평소에 만나뵙는 사제단 원로 안충석 신부, 황상근 신부, 최기식 신부, 양홍 신부, 송기인 신부님도 보였다. 동일방직의 ‘이총각’, ‘이해동 목사님, 그리고 동기 이병호 주교님이 축사를 하셨다.
동창신부님들을 대표하여 미사를 집전하신 전주 이병호 주교님은 폴 끌로델의 소설 「비단신」에 나오는 주인공 예수회 신부가 해적의 습격으로, 부서진 배의 돛대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인용하시면서, 그런 절박함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귀의하라고, 이제 병상에서 꼼짝 못하고 겸허하게 남의 봉사를 받는 처지로 살아가라는 충고하셨는데 김신부님은 그 충고에 머리를 끄덕이셨다. 모든 것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는 노사제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렇게 아름다운 분들과 사랑스러운 시간을 갖고 돌아오는 길 전해줄 물건이 있어 실비아씨에게 잠깐 들렸다. 그런데 오늘도 그니에게는 ‘홉으로 주고 말로 받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니가 싸준 장어로 집에 와서, 아침과 점심을 굶은 뒤라, 저녁을 정신없이 맛있게 먹었다.
오늘은 보고 싶은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우리 대모님, 로마에서 귀국한 김대사님 부인, 내 일기애독자들, 임봉재 언니에게 안부를 전하는 성심회 수녀님, 작은자매회 수녀님, 지리산에 김몬시뇰과 같이 오셨다 우리랑 함께 천왕봉까지 올랐던 천주섭리회 수녀님들, 이해동목사 사모님, 박영대 선생,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을 펴내던 장안드레아 선생… 우리가 주변에 참 좋은 분들을 모시고 사귀며 살아왔다는 행운을 새삼 깨달은 하루였다. 우리가 늙어가면서도 외롭지 않고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이유이리라.
밤에는 빵기가 열흘 출장에서 돌아 왔다는 카톡으로 손주들과 얘기를 나누고 두 손주의 플룻 연주도 듣고… 우리가 늙어가면서도 마냥 행복하고 즐겁고 삶이 고마운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