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맑음
연수씨, 정옥씨, 나, 우리 셋은 젊은이들이 구내식당으로 ‘몸국’을 먹으러 간 시간에 아침으로 커피우유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집에 돌아갈 가방을 쌌다. 젊은 사람들이 워낙 모범적인 가정주부여서 우리 나이든 시니어들은 젊은 층에 짐이 되지 않으려 더 부지런히 짐을 꾸리고 더 재빠르게 움직인다.
어제 저녁에도 생선회를 먹으며 약주를 한 잔씩 했는데 술 안 마시는 나를 두고 대리운전기사를 부른단다. 아마 70세부터는 렌트카도 못 빌리고 대리운전도 못하나보다 싶어 잠자코 있었더니 나더러 연수원까지 차를 운전해갈 수 있겠냐 묻는다. 40년 운전경력에 차종은 다르지만 오토나 스틱을 각각 20년씩 했으니 ‘해보지 뭐’ 하고서 운전석에 앉았다.
희정씨가 내 옆에 앉아 ‘좌로!’, ‘우로!’, ‘빨간불!’, ‘유턴!’을 외치는데 주행연수시키는 자동차 학원 강사마냥 운전하는 나보다 더 긴장한다. 다행히 10km의 거리를 별 탈 없이 주행해서 주차를 하고 ‘대리운전료’를 달라니까 원성이 자자하다. ‘불법영업을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아우, ‘되레 연수비를 내라’는 아우… 그들 등살에 한바탕 웃었다.
여러 해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느티나무’의 정을 이번 2박3일 일정으로 마감하자니 헤어질 시간이 참 아쉬웠다.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4·3역사기념관’을 방문하기로 하고 9시에 해설을 부탁했다. 해설자는 우리가 열심히 듣자 1시간 30분 동안 성과 열을 다해 설명을 해 주었다. 열정적인 해설이 끝나고서 덤덤한 어조로 자기 외할머니 가족 전부, 그 주변의 친척 모두가 4·3때 총살을 당했거나 행불자가 되었노라 실토한다.
초등학교 때는 한 학급의 대부분 아이들이 자기와 같은 날 제사라고 제사음식을 가져오기에 설날이 같은 날이듯이 제사도 같은 날인가 생각했는데 철들고 나서 보니 한마을 전부가 사라진 비극과 연관되더란다. 담담하게 해설을 해주는 그니의 음조가 우리를 더 아프게 했다.
다음번에 우리가 독서회에서 읽자고 추천한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의 마을 ‘북촌리’는 제주 지도에서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까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들의 억울함, 아픔, 슬픔, 한…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도 그려낼 수가 없다.
원한의 세월들을 품어온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위령비들, 아우스비츠를 떠오르게 하는 봉안관, 주인을 못 찾아 헤매는 뼛조각들, 그리고 초토화 작전 중에 두 살배기 딸을 가슴에 안은 채 얼어 죽은 ‘변병생 모녀상’… 정말 제주는 잠들지 못하는 섬임이 처절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이 섬사람들이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가져본 적이나 있었더냐? 붉디붉은 동백 한 송이 한 송이가 사라져간 사람들을 상징한다. 어제의 동백이나 오늘의 동백이 같은 꽃이거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많이 다르다.
제주인들이 꿈꾸듯이 ‘제주 4·3’이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으로 우뚝 서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드린다. 그날이 오면 우리를 얽매던 그 많은 속박의 굴레들이 산산이 깨져 나갈 것이다.
똑같이 제주공항 발 1시30분 비행편이지만 그니들 7명은 광주공항으로 떠나고 나만 이스터제트편으로 김포로 돌아왔다. 늙어서 좋은 점 하나가 전철을 세 번이나 무료로 갈아탈 수 있다는 것. 우이신설선 ‘솔밭공원’역에 하차하니 보스코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둘이서 여행가방 하나씩을 끌고 올라오는 길은 마치 하교길에 만난 친구처럼 즐겁다.
작은아들이 쓰다 보내준 컴퓨터 멜빵가방을 들여다보며 좋아하는 보스코를 보고 좀 미안했다. 참 오랜 시간 책 외에는 그의 몫이라고 그럴듯한 물건 하나를 사준 일이 없다. 무엇이든 “됐어 이거면. 아직도 가진 게 너무 많아. 다 남에게 나눠줘야 돼. 꼭 필요한 거 아니면 남의 몫이야…” 오랜 수도생활에서 익혔던 청빈을 평생 지니고 사는 사람. 그가 욕심내는 게 하나 있다면 아내가 늘 곁에 머물러 주는 거라니 오늘부터라도 당분간 성탄선물 삼아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