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2일 화요일, 맑음
윤병훈 신부님의 ‘네팔 기행문’을 페북에서 읽으며 불과 달포 전의 일인데 네팔에서의 열흘이 아득한 옛날의 일 같이 가물거리고 그리워 다시 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실상 우리 인생에서 국내도 아니고 연고도 없는 이국땅을 다시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탈리아를 가게 되는 것도 자연 풍광보다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어서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기억은 늘 아릿한 통증을 동반할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첫 여행지는 평생을 두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되곤 한다.
빵기가 대학에 들어가자 우리는 약속대로 여행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이미 어린 시절을 6년간 제1세계의 삶을 경험한 아이기에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제3세계의 현실과 가난,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하도록. 제일 민감하고 타인에 대한 섬세한 마음과 사회정의와 정치적 분노가 싹터 오르는 청년기여서 인도에서의 몇 달은 걔에게 커다란 문화적 정신적 충격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빵기는 훤칠한 미남이 결코 아니다. 인도에서도 제일 천대받는 민족인 네팔인을 닮은 걔는 그곳에서 네팔인으로 행색을 갖추고 무명치마에 맨발, 허름한 쓰레기통에 버리기 직전의 가방 하나가 전부로, 잘하면 게스트하우스 아니면 노천이나 기차역사 한 귀퉁이에 가방을 베게 삼아 자곤 했단다. 아무도 그의 가방을 털 생각을 안 하더란다.
하루는 철도역사에서 땅바닥에서 자다 유난히 파리가 들끓고 주변이 시끄러워 일어나 봤더니 이미 부패가 시작한 시체 옆이더란다. 18세, 소년을 막 넘은 나이에 빵기는 하루아침에 마음의 키가 한자는 더 큰 기분이더란다. 그 뒤로 미국 센트루이스,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공부하면서도 ‘내가 꼭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라는 인도’라고 할만큼 인도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 사랑은 대학원에서 아빠가 자기의 후학이 되어 교수로 돌아와 주기를 그렇게 원하던 철학대학원을 중도에서 접고 국제대학원을 가게 만들었다. 지구상의 가난을 살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작정한 까닭이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여행을 시키며 무엇에 주안점을 두고 어느 나라를 가도록 안내 해 주는 일이 왜 중요한가, 걔의 삶을 보면서 거꾸로 우리가 배운다.
오늘도 나는 걔가 가 있는 마다가스카르 난민촌을 위한 기도를 한다. 간혹 걔가 서울에 오면 내가 흥분하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 한탄을 하고 울분을 터뜨릴 적마다 걔는 오히려 담담하게 나를 다독인다. 전 세계 분쟁지역의 정치상황과 인권,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가련한 처지,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제1세계 유럽과 미국이 거기서 저지르는 죄악상에 분노하고 그 희생자들을 돕기로 살아가는 걔는 이미 내 아들만이 아니다.
미루가 호주에서 아들이 온다고 가슴 설레더니, 오늘은 안셀모가 산청에 내려왔다기에 만나보고 싶어 점심에 초대를 했다. 엄마아빠를 닮아 부드럽고 명랑한 성격으로 어디 가서도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으리라. 이사야는 산청에 있는 공장에 내려와 도와주며 함께 살고 싶겠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낼 때에, 자기 할 일을 찾아낼 때에 비로소 자신만의 일생이 열린다.
어젯밤에 반죽한 피자 반죽이 잘 돼서 피자를 구워 먹었다. 호주에서 양식만 먹던 사람에게 또 피자라니. 그렇지 않아도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도 피자를 먹었다는데... 아무래도 점심메뉴를 잘못 정한 듯하다. 아구탕이나 대구지리라도 해줄 껄.
모니카가 메밀묵을 쑤어 한 모 주었다. 김장김치 다져 김 가루 깨소금 들기름에 무쳐 보스코랑 저녁으로 한 그릇씩 먹었다. 어린 시절 정말 먹을 것 없던 시절의 겨울밤 별미로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최고의 메뉴다. ‘메밀묵 사려!’ 그 어두운 찬바람 속에 간절한 호소를 담아 울리던 소리. 겨울의 밤참을 즐기시던 그리운 친정아버지가 어느 새 묵사발 앞에 와 앉아계신다, 벌써 세상을 뜨신지 35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