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0일 일요일 흐림
꼭 눈이 올 것 같은 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다시는 우리 부모가 아이들 낳지 못하게 해 주세요.’ ‘아이를 돌보지 않는 어른들은 진절머리가 나요.’ ‘사는 게 X같아요.’ 어제 본 영화 “가버나움”에서 열두 살짜리가 재판정에서 내뱉는 말들이다. (물론 영화감독은 관객들에게 밥 딜런의 노래를 환기시키며 베이루트 빈민가의 모습에서 국제사회에 아랍세계 전부의 비극을 호소하고 싶었을 게다.)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타인의 울음소리가 들릴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다고 깨닫게 될까?
오 내 친구여,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한 열한 살의 여동생 사하르. 딸의 생리를 부모가 알면 어른 다 되었다고 동네 양아치에게 색시로 팔아넘길 게 뻔하자, 부모 눈에 안 뜨이게 공중화장실에 데려가 여동생의 팬티를 빨아 입히고 자신의 윗옷을 벗어 생리대 대신 대어주는 오빠 자인. 그 사하르를 매매혼에서 구출해주려고 함께 도망치려다 실패하고, 열한 살에 신부로 팔려간 여동생은 임신해서 하혈을 하지만 출생증명서가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죽는다, 병원 앞에서! 여동생을 그렇게 만든 인간을 찾아가 칼로 찌른 죄로 붙들려간 자인. ‘난 (사람이 아닌) 짐승을 찔렀어요.’
동생이 팔려가고 무작정 집을 나와 놀이터에서 전전하다 몰래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청소부 라힐을 만나 그니가 일하는 사이 그니의 아이 요나스를 돌보면서 전개되는, 갓난아이 요나스와 열두 살짜리 자인의 연기력은 생존의 현장에서만 체득되는 영화사의 명연기가 된다.
지저분한 슬럼가, 희망이 없는 젊은이들, 좌절 분노 원망... 그래도 신이 심어놓은 한 알의 씨앗인 희망을 품고, 노르웨이로 가겠다는 꿈을 안고서 버텨온 주인공이 자기 출생증명서 사진에서 딱 한 번 웃던 얼굴. 아랍인 아이들의 삶에서 누가 저 미소를 앗아갔던가! 영화가 끝나고도 흘러야 할 눈물마저 길을 잃어 가슴에 고여 저려오던 시간...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유럽과 미국이 배후에서 벌이는 아랍세계의 전쟁, 빈곤, 무지, 폭력... 저 모든 악을 저 빈민들과 어린이들이 무슨 수로 극복할 수 있을까? 그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무력함’에 치가 떨린다.
보스코의 친구 김양은씨가 죽었다는 부고가 아침에 왔다. 아내의 치병을 위해 수년전 정읍에 내려가 정성을 기울이던 남자가 부인보다 먼저 암으로 죽었다. 근년에도 보스코의 동창 배순섭씨, 임경주씨, 엄창주씨, 김송현씨도 세상을 떠나고... 가깝고 먼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우리 차례가 가까움을 가리킨다.
어린이미사에 가서 어린이들과 신부님께 좋은 기운을 받고 돌아오면 일주일을 사는 게 행복하다. 모처럼 율동찬양도 하고 교회학교 졸업식도 했다. 고등학교까지 수료한 졸업생은 딸랑 네 명. 그래도 그 소수가 나오는 주일학교에서 복사도, 중딩고딩도, 주일학교 선생도, 그리고 장차 사목위원들도 나올 게다. 수녀도 사제도 나오면 더 좋고.
점심은 자훈이랑 정태가 모처럼 집에 있어 함께 먹었다. 우리 아들들이 멀리 있어도 남의 아들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니 외롭지 않고 나도 그 애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
의사선생님이나 주변 사람들 모두가 보스코의 살길은 ‘걷는 일’이라는데 오늘도 점심 먹고 2층으로 올라와 소파에 누워버린다.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애걸하여 겨우 그의 게으른 몸을 일으켜 뒷산엘 올라갔다. ‘집 뒤로 이런 산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데 그것도 모르고 복을 털어내고 있다구요.’ 라고 한탄을 하면 저 만큼 떨어져 못 들은 척한다. 아내에게 끌려나오지 않고 스스로 혼자 나와 걷고 있는 아저씨들을 보면 기특해서 업어주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 김병도 몽시뇰이 세우신 양로원이 꽃동네 꼭대기에 있다는 소문을 옛날부터 들은지라 둘이서 몇 군데 골목을 둘러보다 쉽게 찾아냈다. 벨을 누르고 '산넘어 사는 우이성당 교우 성염'이라고 하니 수녀님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귀한 손님이라고 반가이 맞아 주셨다.
'자애로운 성모의 집'에는 복자회 수녀님 세 분이 스물세 분의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있고 신부님도 계셔 매일미사를 드린다니 가톨릭 신자라면 최상의 조건이다. 집안을 둘러보니 수녀님들의 자상한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고 그곳에 사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밝고 고와 찾아간 우리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부모를 어디에 모셔야 할까?' 하는 염려가 어느 새 '이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걱정으로 바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