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4일 목요일, 맑음
발렌타인데이. 발렌티노 성인은 3세기의 성인으로 군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전쟁을 나가는 군인이 결혼으로 인해 군대에 소홀할 것을 염려해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결혼 금지령을 내리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몰래 혼배미사를 올려주었던 의사이자 사제였단다. 오늘이 발렌티노 성인의 순교 축일이다. 로마의 코스메딘성당(‘진리의 입’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하수구 뚜껑이 있는 성당)이 발렌티노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공경하는 곳이다.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젊은이들의 정열이 부럽기도 하고, 요즘처럼 입속에서 잠깐 달콤하게 녹아버리는 초콜렛 정도의 사랑만 하는 약삭빠른 젊은이들을 보면 씁쓸하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아무 상관없이 상업적 심리로 초코렛만 팔아먹는 얄팍한 일본인들의 심보 같기도…. 그런데 오늘 우리 보스코는 오늘 발렌티노 성인에게서 쵸콜릿보다 더 큰, 삶을 선물 받았다.
엊저녁에 짐을 벌써 차에다 실어 놓고 새벽에 일어나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보스코는 걱정도 안 되는지 밤새 잘도 잤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이 그다. 같은 잠자리에서도 나는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사람의 두뇌는 예컨대 보스코의 수술을 두고도 최선과 최악을 떠올리며 스펙트럼이 무궁무궁하게 펼쳐지는 스펙타클을 갖추고 있다.
병실 침대에서 핸드폰을 열어 아침 기도를 하고, 대모님이 가져다주신 ‘루르드 성수’를 그의 가슴에 심장이 있는 부분과 목과 머리에 고루 뿌려주고, 환자복 주머니에는 기적의 성패를 넣어 주었다. 개신교에서 보면 죄다 미신인데,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의 무사귀환을 비는 어미의 마음 같이) 마치 전쟁터에 내보내는 아들에게 하듯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병원이라는 데가 각자의 아픔을 갖고 오는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제일 커 보이는 게 평범한 사람들의 심사다.
오늘 심혈관조영술을 받는다. 심장에 유액을 흘려보내며 관상동맥에 조금의 물길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스텐트를 동시에 장치하겠단다. 그게 안 되면 다음 주 월요일에 가슴을 열고 수술을 하자는데 늙고 어수룩한 노인 하나가 병상에 앉아 있다. 그가 내가 50년간 사랑해온 그 젊은이라는 게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알아볼까? 반세기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세월의 이편으로 옮겨온 내 사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거나 더 농익었다는 사실에 ‘사랑은 하느님이시다.’ 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가 수술실로 들어간 후 문밖에서 보호자를 호명하기를 기다리는 한 시간 반. 바로 옆 의자에서 고2 딸과 엄마가 앉아서 학교 성적과 ‘공부 공부 공부’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냥 흘려듣는 내가 이렇게 미쳐버릴 것 같은데 매일 그런 말만 듣는 그 딸은 얼마나 병들어 있을까! 견디다 못해 내가 한마디 했다.
“내 귀에는 한 시간 반 동안 두 모녀의 할 얘기가 어떻게 저것 밖에 없을까 슬프다. 책이나 음악이나 전람회. 그림과 꽃, 하다못해 옷이나 영화 등 무궁무진한 세상사가 있는데 어떻게 모녀간에 학교성적, 대학 얘기만 할 수 있느냐?” 모녀가 깜짝 놀란다. 자기네 곁에서 핸드폰 대신 책(칼릴 지브란)을 읽는 이상한(?) 할메가 책을 읽다 말고 그렇게 쓴 소리를 하자 그 모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가능한 한 공부는 조금하고, 많이 놀고, 여행 다니고, 남에게 착한 일도 해보는 게 인생에 더 큰 공부가 된다”고 일러주면서 집에 가거든 “창가의 토토”를 사서 엄마와 딸 둘이 다 읽으라는 훈수까지 했다. 그래도 모녀가 내 얘기를 듣고 순순히 “창가의 토토”를 읽겠다니 구원의 여지가 있다.
보스코의 스턴트 수술은 잘됐다. 그를 수술한 호흡기내과 집도의가 나를 불러 녹화된 수술장면을 보여준다. 꽉 막힌 관을 뚫어 연결하자 피가 혈관을 통해 심장의 3분의 1이나 차지하고 있던 사막으로 퍼지고 사막은 금방 옥토로 변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우리 준이 서방님이 저렇게 심장의 핏줄기가 말라버려 죽었구나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의 간격이었다.
보스코는 중환자실로 가고 정해진 면회시간 외에는 보호자라고 특별히 그곳에서 할 일이 없는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대모님 김상옥수녀님과 스테파노씨를 차로 모시고 오늘 왜관을 다녀온 이엘리가 문병차 우리 집에 들렸다. 금식중인 보스코를 대신해 나는 맛있는 저녁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이래야 세상이 공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