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밖에 없는
100주년 기념이란 거울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사회 각계에서는 민족의 치욕과 어려움을 떨치고 일어난 기미년 3·1운동의 100주년을 맞는 올해를 ‘평화와 통일의 원년’으로 삼고자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 결실의 하나로서 다가오는 3월 1일 다양하고 새로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뜻을 만방에 떨치려 하고 있다.
3·1운동은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특히 종교단체와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오늘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힘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는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져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함께 역사의식을 새기고 평화와 화해의 길로 갈 수 있는 공동의 자양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밖에 없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천주교회의 모습은 넘치든 부족하든 우리의 거울이 될 것이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춰지고 있는가?
주교회의는 지금
지난 2월 13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소식’에 전례문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은 ‘3·1운동 100주년 기념 미사 고유 전례문’이고 내용은 짧게 한 줄로 소개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를 거행할 경우 첨부한 기도문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사제의 고유(?) 권한이니 3월 1일 전례력대로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미사를 할 수도 있고, 3·1운동 100주년 기념미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념 미사를 거행할 경우”라는 전제를 단 것으로 이해한다.
주교회의는 이와 별도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 논문 공모’를 2월 7일자 보도 자료로 올렸고, 3·1운동 100주년 기념 세계종교인 평화기도회를 2월 18일부터 2월 21일 까지 열린다고 일정으로 알렸다. 주교회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 논문을 통해 독립운동에 관련된 한국천주교회 측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밝혔으니 이후 결과를 주목한다. 그러나 한반도가 맞이하고 있는 민족운명의 전환점에서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100주년 기념사업은 아닐까? ‘한 번 밖에 없는 100주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앞섰다면 지난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의 안건은 좀 달라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제주교구와 의정부교구는 지금
한국천주교회 16개 교구 중 현재까지 3·1운동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소개된 교구는 제주교구와 의정부교구뿐이다. 조금은 무관심(?)한 다수의 교구에 비해 두 교구의 움직임이 빛나 보이지만 사실 천주교인의 미사전례문에 나오는 말처럼 3·1운동 100주년에 대한 응대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있는 종교인의 모임이라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다. 오늘이 모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버스 지나간 뒤 “사실은 우리도….”라는 모습은 역사에서는 기억하지 않는다.
의정부교구는 삼일절 100주년 기념미사 포스터에 담은 “1919년 삼일 만세운동, 그 후 100년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습니까?”라는 한 문장 속에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제주교구는 강우일교구장이 참석한 기자 간담회에서 제주교구 3·1운동 100주년 기념 위원회의 발족을 알리고 ‘3·1운동의 정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지역사회와 나눔으로써 3·1운동의 정신과 제주 4·3의 정신이 지금 여기를 사는 제주인들의 마음속에 다시 뜨겁게 타오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방식의 활동을 전개’하려한다고 위원회의 분명한 목적을 밝혔다. 교구민을 넘어 지역민과 함께하고 한민족의 일원이 되는 종교인들의 참 모습이다.
새로운 역사, ‘오늘’이 시작점이다.
천주교인에게는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와 함께 입에서 떠나지 않는 기도문이 ‘성모송’이다. 그 성모송에 나오는 한 구절 “이제와 우리 죽을 때”는 늘 발아래를 비추어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시간인 오늘이라는 ‘이제’와 주님께 나아가는 귀천하는 순간인 ‘죽을 때’는 글자만 다른 뿐 그것은 같은 말이다.
일제강점기, 무엇보다 기미년 3월 1일 당시의 천주교회는 ‘조선인’을 위한 천주교회가 아니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기해년 3월 1일의 천주교회는 ‘민족’을 위한 천주교회여야 한다. 역사 속에서 함께 숨 쉬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천주교회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분명 오늘 우리가 하는 일로 결정되는 것이다. 교회가 인격체로서 성모송을 바친다면 ‘이제’와 ‘죽을 때’ 역시 같은 말이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공동체로 사람들을 데려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