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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죽을 목숨이면서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 전순란
  • 등록 2019-02-25 10: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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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3일 토요일, 맑음



휴천재엔 세 곳에 꽃이 있다. 제일 예쁘고 실한 꽃은 뽑혀서 2층 마룻방 창가를 차지하고서 주인의 사랑과 감탄을 받으며 맘껏 뽐낸다. 가까이 있으니 제 때 물을 얻어 마시고 때론 영양제도 얻어먹고 떡잎은 보기가 무섭게 제거된다. 그러니 예쁜데다 점점 더 예뻐진다. 늦봄에 마당에 내려다 손을 봐도 변함 없이 충성을 다하니 늦가을이면 또 2층 창가를 다시 차지한다.


그 다음은 1층 식당에 비교적 예쁜 포인세티아와 난초 등을 놓아두었는데 아침과 저녁은 2층에서 먹으니 하루에 한번 점심식사시간 외에는, 내가 음식을 하거나 손님이 오실 때 외에는 거의 내려가는 일이 없다. 사랑과 관심을 못 받아선지 실하던 꽃들이 잎을 떨구더니 이젠 아예 벌거벗은 채로 농성을 한다. 봄에 가지를 쳐주고 흙을 갈아주고 화분을 바꿔 주면 마지못해 새잎을 틔우지만 2층 것들과 달리 게으름을 피운다.



나머지 ‘죽지 말고 살아만 있어 다오’ 하는 화분은 불기 하나 없는 벽돌방 창가에 가까이 놓아두는데 그 애들은 내게 기대를 하지 않고 해님하고만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질기고 거친 생명으로 겨울을 견뎌낸다. 주로 데크 밑 국화와 민트 사이에 빈 공간을 채워주는 베고니아들이다. 벌써 십 수 년을 생명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가상한 식물이다.


그 외에 마당 끝 수선화와 튤립, 공작, 달맞이꽃, 범부처, 매발톱, 장미, 범의꼬리, 패랭이, 섬초릉 등이 두서없이 저 클 자리를 찾아 적당히 크다가 적당히 꽃 피고서 지고, 잡초와 엉켜 생존의 위협도 받는 가운데 어떤 건 사라지고 어떤 건 명맥만 유지하고, 범의꼬리처럼 모든 잡초보다 터 잡초답게 싸워 이겨 끝없이 영역을 넓혀가기에 오히려 일부가 주인에 의해 제거당하는 것들도 있다.


이 불쌍한 식물 중에 우리 텃밭의 나무들도 있다. 그래도 주인이라고 배나무밭, 자두와 체리와 감나무를 가꾸기는 가꾸는데, 그야말로 주인이 기본도 모르고 키우고 있으니 산발을 한 배밭에 흰 망사모자(방조망)를 벗어버리려고 가지를 멋대로 뻗으며 몸살하는 배나무들을 볼 때 마다 대책이 안 섰다. 


이런 우리 배밭을 안쓰럽고 관심있게 본 김원장님이 ‘나무 손질은 이렇게 하는 거다’를 보여주려고 날을 잡아 ‘배밭 전지’의 고수 한 분을 모셔왔다. 임실의 강집사님이다. 김원장님의 부모님과 같은 교회를 다니시는데 인품까지 고수여서 두 어르신이 수행하여 모셔왔다.


두 어르신의 며느리 문섐의 말이 아들과 어디가기를 좋아하는 아버님, 모든 것에 놀라운 호기심을 보이시는 어머님이 이 유명한 ‘휴천재 배밭’을 이발하는데 빠지셔서는 안 될 일. 강집사님은 나뭇가지의 10%만 남기고 사정없이 쳐버리라고 전기톱을 든 김원장님께 명을 내리고, 아버님은 방조망 잘라내기, 잘라낸 가지 밖으로 옮겨치우기, 쓰레기 치우기 등을 보스코와 함께 하셨다. 



전기톱으로 전지가위로 시원하게 잘라낸 자리에서 한두 가지만 살려내어 철골에 묶어주는 일을 20여년 배밭을 해 오신 강집사님이 저녁 여섯시까지 해내셨다. 휴천재가 지어진지 25년이니 그만큼 나이의 배나무들이 늙은 티를 벗고 총각처럼 스포츠머리로 시원스레 이발을 했다. 


신경정신과 최고의 의사와 라틴문학계의 ‘빛나는 별’(최원오 교수의 보스코 평)이 수술하고 잘라낸 나무는 그야말로 별처럼 빛나고 홀가분했다. 텃밭이 허전하도록 시원하다. 어머님은 내가 미처 손보지 못한 화단의 잡초를 뽑아내서 수선과 튤립이 자리를 찾게 해 주셨다. 


이발 전과 이발 후의 휴천재 배밭



나는 하릴없이 들락거리며 티도 안 나고 역사에도 안 남을 식사시중과 새참시중만 들었다. 이를 위로하시는 뜻에서 김원장님은 “예수님은 곧 죽을 목숨이면서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 것으로 보아 ‘죽어도 먹고 죽자’는 심경이셨던 것 같다. 식사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성경풀이를 내놓았다.


종일 힘드셨을 텐데도 어르신들이 만족하신 듯했고, ‘심장이요 한 사라!’로 배나무 손질을 못해 애태우던 보스코의 숙제를 해결해 준 김 원장님이 고맙다. 강집사님이 다음엔 부인과 함께 휴천재를 방문하겠다니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게 가장 큰 오늘의 소득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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