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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제2의 3.1운동, 완전한 독립과 완전한 민주주의
  • 김유철
  • 등록 2019-03-05 11:07:54
  • 수정 2019-03-08 11: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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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1월에 열린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 (사진출처=문화체육관광부)


시절은 종교를 불렀다.

지금도 그러한가?


지난 연말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가 열렸고 그 자리에 7대 종단 대표들이 화합의 상징으로 삼은 기왓장을 들고 찍은 사진이 보도되었다. 7대 종단 대표들이 함께 하는 단체가 1997년에 설립된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다. 7대 종단은 기독교‧민족종교‧불교‧유교‧원불교‧천도교‧천주교(가나다순)로 구성되어 있으며 협의회의 설립취지를 “종교인 본연의 역할을 다하려 한다.”고 밝혔다. 


7개 종단 중 유교와 불교가 4세기 한반도 전래를 그 기원으로 잡는 것에 비해 천주교(1784년)를 비롯한 다른 종단들은 18세기 이후 ‘시대가 불러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천도교(1860년), 기독교(1884년), 원불교(1916년), 민족종교에 포함된 대종교, 수운교, 증산도 등 역시 19세기에서 20세로 넘어오던 시기 한반도에 창립된 종단들이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에는 그 시기에 종교들의 필요성이 급격히 생겼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시절의 신’이 민족의 종교성을 깨운 것이다. 종교는 종교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적 기운과 다르지 않다.



다시 3.1독립운동을 되새긴다.


▲ 민족대표 33인 (사진출처=삼일공감)


기울대로 기운 조선의 국력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강제적 개항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 군대해산, 1908년 토지 침탈을 위한 동양척식회사 설립,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후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3인 밀사와 1909년 대한의군 참모장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는 등 항거를 하였지만 국권상실의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침략자들에게 ‘조센징’으로 불린 사람들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총독부는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고,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결국 민중에게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국권을 빼앗긴 후 민족세력들은 의병운동‧계몽운동과 함께 만주 등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이루어지고, 1918년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는 억압적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국들에게 한 줄기 빛의 발견이었고 용기 충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시점에서 새로움에 눈을 뜬 종교인들이 모였다.


1919년 1월 고종의 독살설과 2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후 국내에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천도교 손병희, 기독교 이승훈, 불교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후 고종 장례일 이전인 3월 1일을 선언문 발표 날로 잡았다. 무엇보다 종교단체이기에 조직적 선언문 배포와 집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 바다. 결국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여러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3.1만세운동은 1919년 5월 말까지 전국 1500여회 이상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인원 200여만명,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만6000여명, 수형자 4만7천여 명, 소실된 건물 760여개 등이었다. 200여만 명이상이 참가한 민중시위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후 최대의 민중적 에너지가 분출된 사건이었다. 민중 촛불의 출발이기도 했다.



교황청 안중에

한민족은 없었다는 숱한 자료들


교황청이 한국 교회에 가졌던 태도는 한국 민족이 겪고 있는 감정과는 달랐다. 1922년 4월. 조선총독 사이토와 정무총감 미즈노, 그리고 총독부인 마쓰미야 등 3명이 교황 베네딕토 15세로부터 성 실베스텔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한국 주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데 대한 답례였다. 총독은 베네딕토 수도원의 사후어 대원장과는 아주 막역하게 지냈고,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를 빈빈하게 식사에 초대하였다. 이것은 정권을 지지하도록 하는 기능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국 교회의 통치권자들은 자존심을 팔아 교회를 지키고, 교황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없는 강도를 표창함으로써 탄압 정치를 도덕적으로 합리화 내지 정당화시킨 격이 되었다. 교황청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 또는 신성시한 극단적인 표현은 신사 참배를 허용한 일이다. 정교 분리원칙을 선교 정책으로 선택한 것은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천주교회의 추세였다. 그리고 로마 교황청마저도 한국을 일제의 종속 국가가 아니라 일제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인정한 이상 왕권신수설의 입장에서 독립 운동은 반정부행위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교구장들이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나 관심을 아예 무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복장은 종교인이었지만 내심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설사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런 행위가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기 위함’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도 하지만 죽음으로서 신앙을 이어온 ‘순교’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한국천주교회로서는 옹색한 변명이거나 거짓에 불과한 일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일제하에서 천주교회가 아예 ‘폐쇄’ 되었더라면 교회사와 민족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종교계의 민낯과 세상의 시선


2018년 종교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아니 들끓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계종 적폐청산 시민연대는 자승 전 총무원장 구속, 설정 총무원장 퇴진과 종단개혁을 촉구하며 단식했다. 개신교의 경우 명성교회 부자세습을 비롯한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부패의 문제는 식상할 정도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 PD수첩 >의 보도대상으로서 세간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듯해도 빙산 아래로 감추어진 것이 많은 천주교의 경우는 대구대교구의 복지시설, 교육시설, 의료시설 등에서 여러 비리가 몇 년에 걸쳐 줄기차게 지역 언론의 조명을 받았고 결국 체육시설-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이라고 부르기에는 더없이 부끄러운 골프장 불법회원권까지 도마 위에 올려져 ‘한국방송기자대상’의 대상이 되는 굴욕의 영예를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의 자정노력은 백년하청이고 이른바 중앙 언론들은 외면하거나 침묵했다.


▲ (사진출처=대구MBC 뉴스 갈무리)


대구MBC가 1월 18일 페이스 북에 올린 글은 지역사회가 어떤 눈으로 천주교를 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다. “해방 이후 대구경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해온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비리 의혹을 추적한 탐사보도.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검은 비리 의혹 집중보도’가 2018년 한국방송기자대상 지역기획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지역 언론의 침묵의 카르텔을 뚫고 과감히 메스를 댄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2019년의 한국종교계가 100년 전 1919년의 종교계에 비추어 어떠한가이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운명을 제 몸의 아픔인 양 여기며 고난을 무릅쓰고 독립선언문을 적던 종교 선배들, 독재 권력의 철퇴 앞에서 구국의 민주주의를 선언하던 날선 종교인의 정신은 어디에 두고서 퇴출 없는 ‘정규직 직업종교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 온당치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3.1운동 당시 천주교인의 독립운동을 마땅치 않게 받아들였던 교구장들은 정교분리를 겉으로 내세웠지만 그들은 일본을 위한 ‘질서 있는’ 정교일치를 실천한 것이며, 현재의 한국사회를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에서 온당치 못하게 하는 책임 속에는 검은 종교계와 검은 정치계가 이른바 ‘밀당’을 통한 정교분리로 가장된 정교일치 사회에서 서로를 연명시켜주며 갖은 비리와 부패가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곰비임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회복 그리고 완전한 민주주의


제2의 독립선언은 가능한 일인가? 100주년에 즈음한 3.1독립선언이 단순히 시간적 개념으로 행하는 반복된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반도의 20세기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민족의 자존을 비롯한 모든 것이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남북의 분단으로 인한 이념의 전쟁과 외세의 지배로 점철된 100년이 지난 이 시점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 민족의 자존을 세우는 완전한 독립, 완전한 통일, 완전한 민주주의로서 나가야 출발점이다.


완전한 독립은 완전한 통일로 가는 21세기의 방법이고, 완전한 통일은 완전한 민주주의로서 민족 앞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이념적이고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남쪽의 대한민국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통분모인 ‘민주주의’가 제2의 독립선언의 뼈대가 되길 바란다. 제2의 독립선언이 100년 전 종교의 밑바탕에서 새 하늘‧새 땅을 맛본 선각자들처럼 각계각층이 함께 연대하고 들불처럼 피어나 민족의 앞길을 열어나가길 기대한다.


⑴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http://www.kcrl.org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정병준. 돌배개. 43쪽

⑶ <교회사 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2-30쪽



<가톨릭평론>(우리신학연구소) 3·4월호에 실린 것을 수정요약 한 글이다. 원문 일독을 권한다.




[필진정보]
김유철(스테파노) : 시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삶예술연구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민예총, 민언련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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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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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cmaca2019-03-05 11:49:46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가,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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