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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은 올곧게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 이기우
  • 등록 2025-03-27 18:03:43
  • 수정 2025-03-27 18: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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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금요일(2025.3.28) : 호세 14,2-10; 마르 12,28-34


법은 상식의 최소한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물처럼 흘러가야 한다는 뜻이 법(法)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고 법조인들의 권위는 물 위에 떠있는 가랑잎처럼 가볍기 한량없습니다. 저들은 법을 해석하는 권능을 무기 삼아서 대한민국의 공동선을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비상 계엄령을 발동하여 내란 상태를 초래한 현직 대통령을 국회에서 탄핵한 후 행정부는 직무 대행 체제로 전환되었으나 국회를 통과한 법률들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월권적으로 남발하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늦어지면서 이를 촉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집회가 전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민주적 헌정 질서가 무너져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적신호가 켜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광장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 혼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지에 대한 빛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호세 14,2).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한편, 다시 한 번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만민을 당신께로 이끄는 길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호세 14,10).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의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의인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류를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런 자비로운 섭리에 대해 호세아가 이런 말씀을 남겨 놓은 바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 14,6-7).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호세아 예언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처럼 선대 조상들이 동물들의 모습을 본딴 상을 세우는 어리석은 우상 숭배의 소행에서는 벗어났으나 그렇다면 정작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아 볼 것이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마태 5,16 참조). 이라고 가르치신 바 있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슨 상을 새길 필요도 없고 자기 욕심을 부리면서도 남을 억누르는 죄악을 열심한 종교심으로 위장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길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만이 아니라 군중 앞에서도 산 위에서 가르치신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모르던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그러자 구원의 역사를 선도해 나갈 소수 의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호세아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이 전한 예언 말씀을 간추려 선포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는 복음의 핵심을 진작에 가르쳐 주시기는 했으나 율법 학자의 질문을 받자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엘리트들과 군중의 현실과 수준을 감안하여 설명해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본시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주신 계명은 십계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모세5경의 핵심이었던 십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 두 계명으로 줄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수령이 생겨나고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본격적으로 밝혀지기에 이르렀는데(마르 12,28-31; 마태 22,34-40; 루카 10,25-28), 소수 의인들을 선도할 당신 제자들에게는 이를 다시 한 가지 계명으로 줄여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가르침이야말로 올곧은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예수님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도, 소수 의인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갔고 다수 죄인들은 이 길에서 비틀거렸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소수 의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해석, 즉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을 압축하신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신명기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주 하느님은 주님 한 분 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6,4-7). 사실 ‘마음을 다 기울이거나’, ‘정성을 다 비치거나’, ‘힘을 다 쏟거나’, 게다가 ‘목숨을 다하거나’(마르 12,30),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동어반복(同語反覆)적인 부사를 표현을 바꾸어 되풀이하는 취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도, 우리 한민족도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祭祀)를 최우선으로 정성껏 바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이어 참 하느님 백성으로 모인 교회에서는 이를 전례(典禮)라고 하는데, 제사에서든 전례에서든 기본적인 요소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기억 행위와, 이를 표현하는 예물 봉헌 행위(탈출 34,20), 그리고 이를 위해 일을 쉬는 파공(罷工)과 안식(安息) 행위(탈출 34,21), 또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기 위한 예언 활동과 식별 작업이 뒤따랐습니다. 이 예언과 식별의 골자에 대해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와 여기서 파생되는 인간 사회의 공동선 가치로 가르칩니다.


십계명의 나머지 일곱 계명을 압축한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레위기를 인용한 것으로서, 율법 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구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부각시키셨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예수님께는 하느님 사랑이 인간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그 ‘이웃’의 범위를 동족으로 한정해 오고 있었고,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보편적 범위로 넓히셨습니다. 더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경우와 모든 사람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행위의 질을 한껏 높이셨습니다. 유다인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발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이 지점에서 구분됩니다.


민족사의 초창기부터 홍익인간(弘益人間), 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을 진리로 떠받들어 온 한민족의 사상도 이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나, - 이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례일 것입니다 - 사상을 넘어 삶의 실천으로는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확한 기준은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전해진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와 이에서 파생되는 공동선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 재화의 보편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과 보조성으로 가르칩니다. 이 모든 가치들이 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 전례에 참여하며 청해야 할 축복은 이런 것이지요.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을 최고선의 가치들과 공동선의 가치들이 한껏 꽃 피우고 열매까지 맺게 될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한 지향으로 성화시켜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와 관련하여 지난 21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관하여 한국민들에게 보내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형제자매님들, 동포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저와 가까운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 사회 지도층과 종교계의 많은 분이 저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비상계엄 후의 우리나라의 무질서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하여 저의 솔직한 의견을 표시해 줄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라는 깊은 사고와 기도를 하였습니다.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현재 88세의 고령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신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의사들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시면서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하느님께 바쳐드리며 치료받고 계십니다. 병이 호전되어 곧 교황청으로 돌아오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건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길 염원하는 전 세계의 많은 분의 간절한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계속된 기도를 통해 교황님의 심신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아울러 여러 면에서 고통 중에 있는 세계의 모든 아픈 이의 회복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교황님은 이미 이 세계의 고통을 치유할 가르침을 주셨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교황님께서 현대인들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가르침을 몇 개 되새겨 봅니다.


첫째, 교황님은 끊임없이 넓은 마음을 가져 달라고 촉구하셨고,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주님 품에 안기기 전까지 안식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삶은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해와 충돌 사이에서 사랑에 기반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 없이 고통은 가중될 것입니다.


둘째, 서로 존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래서 개개인이 사람마다, 또 그가 속한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기본값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셋째, 어려운 이들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하셨습니다. 세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고통받는 사람은 평화로운 시절에도 어려웠던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문제보다 구조적으로 가난하고 힘겨운 삶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들에 관한 관심과 보살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제가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말 고국에서 벌어진 계엄 선포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국회가 신속하게 계엄해제를 의결함으로써 국가적 비극으로 치닫는 일은 일단 멈추었고 수많은 국민이 추위를 뚫고 광장과 거리로 나와 함께 하면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벌써 시간은 혹한을 지나 3월 하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국민의 마음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법은 상식과 양심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사회의 최후 보루입니다. 따라서 되도록 상식과 양심 안에서 해결될 수 있어야 좋은 사회입니다. 성서의 히브리서에는 다섯 차례 양심에 대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9장 9절에서는 현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온전하지 못한 양심’을, 9장 14절에서는 ‘구원받은 양심’을, 10장 2절에서는 ‘죄의 양심’을, 10장 22절에서는 ‘깨끗해진 양심’을, 13장 18절에서는 어느 때고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하는 ‘바른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양심이라는 말이 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미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마음을 넘어, 법을 가볍게 무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무서운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누구보다 정의와 양심에 먼저 물어야 하는 사회지도층이 법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헌법재판소에 호소합니다. 되어야 할 일은 빠르게 되도록 하는 일이 정의의 실현이며 양심의 회복입니다.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정의의 판결을 해주십시오.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가족과 이웃이 싸우고, 수없이 많은 상점이 폐업을 하고, 젊은이들은 어디서 미래를 찾아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모두가 너나없이 ‘어려운 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돌볼 처지가 안 되면 사회는 더욱더 나밖에 모르는 일이 가속화되고, 인간이 서로를 돌보고 협력하지 못한다면 공영의 길은 점점 멀어집니다. 이제 올바르면서도 조속한 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명백히 밝혀주시길 촉구합니다.


저는 평생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에게, 국민은 각자의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그 마음이 사랑이며 치유이며 회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어쩌면 모든 회복의 출발일지 모릅니다.


모두 각자의 양심에 기대어 한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바티칸에서 추기경 유흥식 라자로 드림”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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