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제도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나 자신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와 그 신앙공동체는 오늘날까지 나의 영적인 고향으로 남아있다.”
교회개혁의 시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역인 한스 큉(Hans Küng , 1928- )이 『가톨릭의 역사』 라는 저서의 시작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그는 “(교회의) 지성의 탄압, 종교재판, 마녀사냥과 화형, 유대인 핍박, 여성차별과 같은 현상들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런 일들에 대해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교회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드러낸다. 지금도 그는 교회 안의 희생자들 입장에서 수많은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스 큉은 “잘 조직된 가톨릭 계급 사회에서 언제나 한 눈은 로마를 응시하면서 상급자에게 맹목적으로 순명하고 하급자에게는 교만한 관료적 성직자들이 많다는 것에 마음이 답답하다”면서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양의 사회공헌을 하고 있는 공동체, 병원, 학교, 사회기관 등 가톨릭교회만의 광범위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협력하는 수많은 평신도들이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세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교회에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희망을 선포하던 한스 큉이 만약 2019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황을 본다면 어떨까. 아마 그 희망의 말조차도 거두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교회 안에 수많은 사회복지기관, 병원, 대학, 시설 등에서 불거져 나온 사건 사고들과 그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정서나 의식수준과는 동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삼위일체와 삼권분립
신학에서 ‘삼위일체’는 간략하게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독자적이면서도 일치하게 상호 관계되고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국가에서는 입법, 행정, 사법부가 독립적이면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기능할 때 자유와 평화와 연대성을 보장하는 효율적인 집단이 된다. 이러한 삼권의 효율적인 균형상태를 우리는 ‘삼권분립’이라 말한다.
2019년은 사법부 수장이었던 양승태 대법원장의 구속으로 시작되었다. 사법부의 독립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품격을 말한다.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된 ‘국정농단’이라는 말과 더불어 2018년에 이어 2019년에 이르기까지 ‘사법농단’이라는 말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공간이어야 할 사법부가 세속의 야심과 욕심으로 정의의 심판, 자유의 옹호라는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 비루한 처지가 되어 버렸음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이라는 말은 국가의 권력을 한 군데에 집중시키면 폭주 시 제동을 걸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기관에 분산시키고 그들을 상호 독립시킴으로써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확보하려는 제도적 균형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최근 사법적폐, 사법농단이라는 말이 회자되며 판결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삼권일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활용하며 국정농단의 주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과 불의의 행정부와 입법부 편을 들며 공동체의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정황과 증거들이 차고 넘친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과 견제 받지 못하는 권력이 국가와 국민을 어떻게 기만하며 국격을 훼손했는지 우리는 가까운 현대사 안에서 무수히 많은 체험을 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에 의하면 국가의 삼권분립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은사(Charisma)의 다양성(고전 13장)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바른 법질서를 유지하려면 입법, 행정, 사법부의 다양성과 함께 독립성이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행정부가 입법부나 사법부 위에 군림할 때는 삼권분립의 질서, 즉 이것들의 다양성과 독립성이 훼손되고 따라서 독재가 등장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견해다.
분권과 집중의 딜레마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교회의 주요 4대 교리 가운데 하나다. 교회의 교의(Dogma)는 ‘교리’를 통해 믿는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본체라는 것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삼위(三位)’의 하느님은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토라(모세오경) 가운데 하나인 신명기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는 성경 구절에 근거한다. 곧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셨다. 당시 종교권력의 정점이었던 대사제와 산헤드린(의회)은 예수가 민중들 안에서 차츰 인지도가 높아지고 바른말을 하며 대중성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들이 탐탁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들의 절대적 권력을 분산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예수가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를 신(神)이라고 선포한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께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내가 가면 그분(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하며 ‘성령’이라는 또 다른 신(神)을 선포한다. 예수의 등장으로 하느님과 예수, 성령이라는 삼신(三神)이 형성된다. 유일신 ‘하느님’을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믿어오던 유대인들에게 예수와 성령은 낯선, 그리고 인정하기 어려운 신(神)이었다. 그들의 유일신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분권화(分權化)된 것이다. 이러한 삼권이 일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과 토론이 전개됐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지만 하나의 본체라는 통합이 이루어지며 공식적인 교리로 자리매김 된다.
4세기에 세계사에서 가장 큰 변화라 하면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종교자유’를 선포하며 315년에는 ‘십자가형’을 금지하고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도입했으며 325년 그리스도교회의 신자가 아닌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최초의 교회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의 변방 종교가, 수 세기에 걸친 탄압으로 순교와 죽음으로 박해받던 종교가 세계를 움직이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유를 학자들은 여러 가지 요인을 들어 설명한다.
그리스도교회가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여러 형태의 구호활동과 튼튼한 기반을 갖춘 포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판테온(다신교의 성전)이 상징하는 로마의 다신론(多神論)은 로마황제로의 권력 집중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소수의 신으로 집중하는 이방의 종교이념은 강력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 간절히 필요한 잘 다듬어진 이념체계로 간주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기까지 로마제국의 통일과 삼위일체 신학의 정립은 그 궤적을 같이 한다. 삼위일체 신학의 정립은 로마황제 권력의 집중성과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게 해 주었고, 권력은 종교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수도원의 등장과 지방분권
종교와 권력의 협력으로 제국의 권력은 커졌지만 종교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교회는 스스로의 품격과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 찾기에 나선다. 4세기 광야로 나갔던 수많은 은수자들이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며 수도공동체가 시작된다. 수도원(Monastery)은 ‘홀로’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모노스(monos)’에서 유래되었다. ‘세상과 떨어져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사는 행위’로 이해된 수도원 운동은 초대교회 때 핍박을 피해 은둔한 사람들과 4세기 이후 세속화된 교회로부터 구별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 안토니우스(Antonius, 251경~355/56)는 남아있는 문헌 자료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은수자였다. 그는 세상과 격리되어 극도의 금욕주의를 추구했고 고독한 사막에서 개인 고행과 명상과 기도생활을 강조했다.
반면 서방수도원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네딕도(Benedictus, 480-543)로 수도원 규칙을 체계화시켜 로마를 중심으로 서방교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금욕과 성경연구를 강조하며 완벽한 조직과 형태를 갖추었으며, 귀족들의 후원과 신분상승을 꾀하는 유망한 젊은이들이 합류하며 신학과 학문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넓은 토지에서 얻은 막강한 경제력과 다양한 서적들이 즐비한 도서관이 만들어졌으며 번득이는 지성의 젊은이들이 수도원 학교를 세워 지식의 집중과 진보를 일구는 바탕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들은 대중들과의 소통을 외면하지 않고 빈민구제와 사회사업에 공헌했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늘 그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개혁을 이루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다양하고 수많은 수도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다양한 의견으로 표출될 수 있는 여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품격
21세기 국가는 왜 스스로의 품격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국가가 품격을 훼손당한 것은 일체의 모든 권력을 일부의 소수에게로 집중시키며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사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사람에게 인격(人格)이 있듯 나라에도 국격(國格)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품격은 무엇으로 판단될 수 있는가?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 절제하는가?’라는 물음은 국격의 중요한 가늠자다. 국가가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는가?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는가? 골고루 잘 사는 균형발전, 창의적 국가 비전과 문제해결 역량 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은 국격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또,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다양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합의가 국격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 국격은 실로 참담하다. 지난 정부의 권력자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직행하고 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 이명박, 박근혜, 대법원장 양승태를 비롯한 국정농단, 사법농단 세력들이 구속되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도로를 점거하는 태극기 부대의 반지성적인 행태를 지지, 선동하며 정치적인 부활을 꿈꾸는 정치인들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대형교회 목사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가톨릭교회의 품격
가톨릭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그래도 의미 있는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던 이유는 굴곡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예언자의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2% 미만에 그치던 천주교 교세가 현재 국민 10%의 교세에 이르게 된 것은 지난 독재정권 시절 지학순 주교의 구속으로 촉발된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과 1987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과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가톨릭교회의 평신도와 수도자 사제들의 몫’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 안에서 가톨릭은 사실 부끄러운 과거를 많이 가지고 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뒤 일본 황군의 승전을 위한 기도회를 올리고 위문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으며, 국가(일본)를 위해 적군의 손에 죽는 것은 충신이요 ‘순교’라는 강론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반도청년이 일본 황군에 입대하면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춘다며 징병을 거들고 1940년 결성된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초대 이사장 노기남(일명, 오카모토 가네하루) 신부는 그로부터 2년 뒤 주교로 서품됐다. 1945년 9월 9일에 ‘승전과 해방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고 9월 26일 노기남 주교 집전의 ‘세계평화 회복을 감사’하는 장엄미사와 ‘미군 장병 환영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런 노기남을 기리며 2014년 8월 17일 충북음성꽃동네(대표 오웅진 신부)에서는 ‘노기남 바오로센터’ 기공식을 열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6월 ‘노기남 바오로센터 축복식’을 하면서 스스로의 친일행적을 반성하기는커녕 미화하고 홍보하며 부끄러운 과거사를 다시 21세기 한국 교회 안으로 끌고 들여왔다.
그러나 정작 민족 운동과 평화운동의 선봉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고 종부성사와 마지막 미사를 지내기를 원했지만,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수장인 뮈텔주교는 안중근을 살인자로 낙인찍고 모든 성사를 거부했고 1910년 8월 안중근을 교적(신자명부)에서 지워버렸다. 청계동에서 사목하던 빌렘신부는 가톨릭 교계의 파견 불가 방침에도 불구하고 1910년 3월 2일 여순행을 단행했다. 그리고 1910년 3월 8일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날 수 있었다. 빌렘신부는 3월 9일 감옥에서 종부성사를 거행하고, 3월 10일에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닮은 마지막 미사를 지내면서, 안중근의 숭고한 죽음을 영원으로 이끌었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남긴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경천(敬天)’이 지난 2014년 8월 서울대교구 소유가 됐다. 일본에서 들여온 ‘경천’은 같은 해 3월 서울 옥션 경매장에 7억 원에 나왔으나 유찰되었다. 그 뒤 서울 잠원동 성당에서 5억9000만 원에 경천을 사들여 서울대교구에 기증했다. 과연 이 뉴스를 바라본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부끄럽지 않은가! 친일 노기남을 부활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민족 운동의 선봉장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챙기면서 그를 냉대하고 있다. 해마다 추모제가 열리는 3월 26일 순국일 효창공원에 그들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의 권력은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있다. 주교, 교황이라는 정점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사하면서 생겨난 수많은 역사의 부끄러운 기억들과 수치는 우리들의 몫이다. 그나마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을 시작하는 첫 일성으로 “나는 로마의 주교!”라는 말로 스스로의 권력에 대한 제한과 경계를 내비쳤다. 그러나 지역의 일부 주교들은 그러한 교황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순명하지 않았다. 일부 주교들은 여전히 교회의 모든 재정과 사업과 인사와 정책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며 법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교회 공동체 내의 범죄를 은폐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의한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조직의 보존과 지속, 아니 더 정확히는 사사로운 이익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수많은 소송전을 치르기도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임기가 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지도력과 정보에 대한 판단능력은 한계가 있기에 그 임기에 제한을 두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가진 대표를 선발하여 그에게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에 기초하여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헌법이다. 대통령들은 임기 이후에도 그들의 공과에 따라 법적인 처벌도 가능해 진 것이 세계 주요 나라들의 흐름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다. 그래도 아직까지 피비린내 나는 5월 광주의 살인자는 버젓이 살아 할 말을 다하고,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최고 정점의 주교가 예산의 집행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사제들을 통제하고 언로를 틀어막으며 흐르는 물길을 역행한다. 교회 소유의 사회복지기관, 단체, 시설, 대학, 병원 등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의혹과 의문들에 대해 교회는 어떠한 구체적인 해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을 궁금해 하거나 상식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신도들도 그 수가 적다. 그렇다면 21세기 가톨릭교회의 품격은 어떤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공동선> 2019년 3,4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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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대단한 지식과 이론을 겸비한 신부님이신데...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인지!!!
열혈 사제이신 신부님께서 교회를 정화 시키는 정의 평화 위원장이
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시든지..
먼저 본인이 속한 본당이나 교구부터 바꾸어 놓고 이야기 하시던지...나 참...두리 뭉실하게 전체 교회를 싸 잡아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라도 정확히 진실을 파헤체 이야기 하세요.
한 가지 사실을 정확한 근거와 사실 조사를 해보고 한 가지씩만 정확해 다르는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