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1일 월요일, 맑음
밝은 햇살이 ‘큰할메방’ 깊숙이까지 들어와 북쪽 한구석에 걸린 사진 한 장, 그분이 한국에 왔던 20대 후반의 사진을 보여준다. 요즘 한창 피어나는 수선화처럼 밝고 곱게 풋풋한 나이에 어떻게 그리 사랑스런 생각을 먹었을까?
동족인 의사들도 꺼리던 한센인들을 마치 엄마처럼 맨손으로 그 상처를 만지고 마음을 보듬어 ‘당신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귀한 사람들’이라고 혼신을 다해 돌봐주었다. 보스코도 60년대에 소록도를 방문하여 수녀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환우들 팔다리에 뜨거운 초(파라핀)를 입히고서 정성껏 힘차게 마사지해주던 장면을 목격했다고 회상한다.
나는 ‘큰할메’ 마리안느가 쓰던 방, 그 분의 침대를 사용하며 더욱 그분을 가까이 느끼려고 했다. 집안은 일제시대 적산가옥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고 외벽도 얇아 바깥 한기가 그대로 전해온다. 목욕탕에도 화장실에도 라지에타나 불기가 하나 없어 한겨울엔, 공중목욕탕도 안 가는 서양 할메들이, 어떻게 지냈을까? 화장실 역시 변기에 앉으면 내 키에 무릎과 머리가 벽에 닿는데 큰 덩치의 외국 할메들이 그걸 어떻게 참고 사용했을까?
집안에 40여년 쓰던 가구며 살림들이 그대로 놓인 가구들과 옷장 그 하나하나를 둘러보고 그분들은 ‘온전히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산 수도자’였음을 새삼 확인했다. 지금 그 집 지키미를 자처하며 살고 있는 서스텔라 선생의 생활 모습도 보고 배운 대로가 만만치 않다. 저 두 분은 가진 게 없으니 놓고 가는 것도 훨씬 홀가분했겠지. 가난과 헌신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박물관에서 본, 떠나면서 남긴 편지 원본을 보니 그 간결함에 더욱 놀란다. “이제 저희들이 천막을 접을 때가 왔습니다. 소록도 국립병원 공무원들은 50~60 나이에 퇴직을 하는데 우리는 그 기한을 10년이나 더 넘겨 70이라는 나이까지 일했기에 몸도 건강도 더는 허락치 않아 우리가 없이도 잘 돌아가는 것을 보고 더는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납니다.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기에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도 ‘떠날 때를 알고’ 이렇게 멋지게 떠날 수 있을까? 새벽 찬바람과 어제 내린 비로 말끔히 씻긴 중앙 공원에 세워진 공적비만이 그분들이 남긴 흔적은 아니리라.
또 다른 흔적이라면 그곳에 멋진 공원을 세우기로 작정한 일본인 스오원장의 동상 자리다. 1942년부터 8년 9개월 동안 제4대 원장으로 재직한 스오원장은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그 공원 조성을 시작했고 자신의 동상을 세웠지만, 그의 잔혹행위에 못 견딘 환우 이춘상에게 단칼에 살해되고 말았다, 동상이던 원자재는 1943년 태평양 전쟁 물자로 징발되어 사라지고, 그런 자의 비참한 최후를 기억나게 만드는 동상받침만 남아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종로 탑골공원에 있던 이승만의 동상을 쇠줄에 묶어 사람들이 질질 끌고 다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 행악의 역사를 공덕비로 남기려던 자들, 오로지 선업을 흔적 없이 감추고 떠난 이들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오늘까지 소록도에서 지내려던 계획은 내일 스승님과의 고별로 인해서 그냥 접고, 있던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시트는 빨아 널고서, 성당에 올라가 예수님께 인사하고 식당에 들렸다. 서스텔라 선생은 앞바다에서 캔 바지락과 뒷산 양지바른 곳에서 뜯어온 쑥국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밥을 지어 개미있는 전라도 김치에 멍개젓갈로 이별의 식탁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전라도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내 남편의 고향이어서일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흐르는 끈적끈적한 인간미에 매료되어서다. 오늘 하루 일찍 떠나지만 언젠가 꼭 돌아오리라.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양에 들러 독서회 아우님들과 모임을 갖고, 빗속을 가르고 열심히 묵주기도로 어둠과 무섬을 달래며 서울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