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목요일, 맑음
‘철가면’을 쓰면 물론 잠이 쉽게 오지 않겠지. 온몸을 긁다 보면 오던 잠은 더 멀리, 쫓아 갈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 버리고… ‘효자손’이 어둔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오른손 왼손으로 등짝을 북북 긁어대는 소리에 나까지도 잠의 뒷꼬리를 붙잡고 강강수월래!
시작 지점도 끝 지점도 안 보이는 새벽 두시, ‘긴 방’으로 옮겨가서 자려다 왠지 남편에게 ‘배신 때리는’ 듯해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 본다. 그때 그가 신경질적으로 철가면을 벗어 집어던지더니 벌떡 일어나 서재로 간다. 그를 따라 잠을 더 자기는 글렀다 싶어 나도 일어나 거실로 나가 책을 집어 든다.
막걸리 반말쯤 마신 듯(처녀 적 내 주량?) 멍한 머릿속에 책 이야기가 들어 올 리가 없다. 마루에서 깜빡깜빡 졸다가 그 정신으로 화분에 물주고, 마루를 걸레질하고, 낮인지 밤인지… ‘철가면’을 벗으면 ‘무호흡증으로 횡사한다’ 의사가 겁주고, 씌우느라 용을 쓰면 엄엘리 말마따나, ‘잠을 못 자면 치매가 온데요’라니… 철가면을 쓰고도 평소에 안경 쓰듯 자연스러워져야 한다면서 ‘죽을 때까지 쓰라’는 의사의 처방, 나 같으면 ‘그걸 쓰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구, 우리 불쌍한 보스코! 그래도 새벽에, 바람이 일기 전에 일어나서 휴천재 배나무 소독도 했다. 배꽃 피기 전에 한 번, 배꽃 지고 나서 한 번, 배봉지 싸고 나서 한 번 병충해 방지 소독을 안 하면 흑성병으로 배도 잎도 다 떨어지고 만다.
오전에 부지런한 kt ‘명호아저씨’가 왔다. 이 지역 인터넷과 스카이 A/S맨으로 사람들은 그를 모두 좋아한다. 마치 조카나 아들 정도로 고객들에게 이무럽게 굴어 내 친구 체칠리아는 멀리 부산에서도 빈집 인터넷을 고쳐놓으라고 열쇠를 맡긴다. 우리도 나가면서 ‘집 잘 보고 고쳐놓고 가요’라고 한다. 없어질 것도 없는 소박한 살림이기에 뭐가 없어질까 걱정하는 일 없이 집집이 집문, 방문을 열어놓고 사는 게 우리 동네 문정마을.
커피와 간식을 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준다. 자기가 처음이 일을 시작할 때는 이 지역 집집이 2메가바이트 속도였는데 이제는 5기가바이트 속도로 바꿔드린다면서 세상 참 빨라졌단다. 그전엔 모두 컴퓨터를 집에 갖고 있었지만 이젠 손안에 쥐어지는 핸폰이 모든 것을 해결하니까 컴퓨터 장사(노트북 빼고는)는 싹 망했단다. 자기도 게임을 즐기는데, 살림하는 여자들마저 새벽 한두 시까지 이리저리 핸폰의 게임방을 기웃거리는 걸 보면 딱하단다.
어제 ‘신태 아저씨’에게 대세를 못 주고 와 떨떠름하여 보스코더러 오늘 한 번 더 가자고 했다. 우리야 늘 바쁜 생활이지만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어) ‘영혼을 구하는 일’에 이보다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병실에 들르니 막 저녁이 끝난 뒤. 어제는 하도 난리를 쳐서 주사를 놓아 재웠다는데 오늘은 보스코를 알아보고 ‘교수님 오셨다’고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당신 나이가 (재작년 돌아가신) 부면장 신택씨 보다 다섯 살 많아 보스코보다는 여섯 살 많으니 여든 셋이라는 말도 했다. 부인 모니카와는 어제 의논을 했기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가?’ 묻고 ‘온 가족이 다 믿으니 본인도 세례를 받겠느냐?’고 물으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가져간 물병과 수건을 꺼내놓으니 보스코가 그의 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아우구스티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아멘.”이라며 대세(代洗)를 주었다. 환자가 ‘아멘’이라고 따라 대답했다. 3층 병실에서 부인 모니카씨도 내려와 환자를 에워싸고 우리는 주모경을 바쳤다. 아저씨가 보스코에게 순한 아기처럼 조용해서 놀랍다는 부인의 얘기.
우리는 ‘대세 보고서’를 제출할 겸 성당에 가서 수녀님에게 환자방문과 기도를 부탁했다. 7시 30분에 본당 미사가 있기에 노인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맑은 정신으로 세례를 받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영혼에 관한 한 ‘모든 게 은총’이어서 하느님 당신 마음이지만, 우리 인간은 구원의 신비에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아무리 좁은 틈새로도 하느님의 구원은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