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일 수요일, 맑음
보스코가 읽다 두고 간 시집에 눈길 멈춘다. 내가 좋아하는 아우님 김유철 시인의 포토 포엠 에세이집 「그림자 숨소리」. “그가 오는 날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기 예수를 기념하는 성탄절이다. 예배하고 나오는 길에 아내에게 말했다. ‘이번 生에 말이야, 그분을 만난 것 하나만으로 충분해. 아니 넘쳐.’ 아내가 잡은 손을 꾹 쥐었다.” 김유철의 逢.봉!
정말 생을 살아가며 ‘이승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난 정말 행운이다!’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금년 초 폐렴으로 갑자기 하느님께로 가신 잔카를로 신부님. 1997년 봄. 보스코는 안식년을 맞아 로마에서 지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마저 번역 주석하기로 작정하고, 그 당시 살레시오수도회 부총장으로 계셨던 윤루카 신부님에게 우리가 한 2년 머물 집을 찾아달다고 부탁했다.
그분이 마련한 집이 살레시오수도회에서 관리하는 교황청의 ‘산칼리스도 카타콤바’ 입구에 있는 집이었다. 중세부터 카타콤바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아주던 문지기 수사의 집이었다. 아래층 10평, 윗층 10평의 아주 작은 집으로 ‘쿼바디스(Quo vadis?) 성당’ 바로 앞에 있었다.
집 양옆으로 로마의 고대 도로 아르데아티나 가도(Via Ardenatina)와 아피아 가도(Via Appia)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아르데아티나 가도의 돌포장길 산페트리니, 아피아가도의 기원전 돌길 위를 현대의 자동차가 쉴 새 없이 달리는 바퀴소리가 보스코를 늘 힘들게 했다. 평생 조용하게만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주택가에 방이라도 하나 빌려 낮에는 그곳으로 가서 번역일을 해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우리 집 위편에 이탈리아 중등학생들의 비정규교육을 책임지는 크노스(CNOS-FAP)라는 살레시오 전국기관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 단체 경리 담당이 잔카를로 신부님이었다. 지나가다 잔카를로 신부님을 만나 보스코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 건물 2층에 빈 사무실이 하나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다. 그때부터 20년 넘는 우리 인연이 시작됐다.
여름휴가철이나 크리스마스에는 트렌토에 있는 당신 가족 집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그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신부님의 열한 명 형제 모두와 친해졌다. 2017년 여름 그 가족을 만난 일과 그 여름 산칼리스도 카타콤바에 있는 수도원 공동체에서 신부님과 함께 보낸 날들을 마지막으로 신부님은 떠나셨다.
매 2년마다 우리가 로마에 갈 적마다 우리와 함께 지내시며 행복해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제 지리산에 내려와 보니 신부님의 막내여동생 죠반나가 신부님의 마지막을 자세히 적어 보낸 편지가 와 있다. 그분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은 바로 피붙이의 정 그대로였다.
오늘 각별히 신부님 생각이 더 나는 까닭은 휴천재 텃밭을 일구자니 농부로서 산칼리스토 정원과 텃밭을 가꾸시던 신부님 모습이 간절해서다. 5월 1일이니 방안에 마지막 남은 포인세티아 화분을 밖에 내놓는 것으로 휴천재 화분들의 겨우살이를 끝냈다. 오전에 보스코는 2층 청소를 하고 나는 아래층 청소를 했다. 점심 후에는 함께 텃밭으로 내려가 보스코는 무밭에 장다리를 뽑아내고, 나는 먹은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은 시금치를 뽑아냈다. 보스코는 한길로 자란 장다리꽃을 괭이로 뿌리까지 캐내고, 나는 호미로 밭고랑을 모양지게 만들어 멀칭을 했다.
내일은 함양장이니 장에 나가 모종을 사다가 심기만 하면 올 여름 식탁을 책임질 먹거리 준비는 끝난다. 면사무소에서 ‘어르신 일자리’ 일을 끝내고 돌아온 드물댁이 찾아와 반가웠다. 이렇게 휴천재의 나날은 자연과 이웃으로 풍성해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