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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필 무렵’
  • 전순란
  • 등록 2019-05-27 10: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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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6일 일요일, 맑음



주일 공소예절을 하러 공소에 내려갔다. 날씨가 더워지며 일들이 많아지고 다들 피곤한 모습이다. 감자꽃 필 무렵 보릿고개면 밭 일구랴 모 내랴 산골 사람들의 일손이 제일 바쁜 계절이다. 벌을 치는 사람도 이산저산 꽃이 피면 꽃 따라 벌들이 바빠지고 사람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대충씨네 처가 식구들이 한 무리 참석하여 공소 보는 숫자가 부쩍 늘었다. 공소예절 후에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난 마천 서베드로씨를 위해서 교우들이 위령기도를 바쳤다. 


진이네는 블루베리 농사라 봄 한 철 바쁠 거라고 생각하지만 겨울에는 겨울대로 블루베리 즙 내리기와 잼 만들기로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봄엔 가지치기와 새 품종심기, 여름엔 블루베리 따기와 판매, 가을엔 김매기와 2차 가공업으로 분주하니 한철 농사가 아니고 1년 열두 달 바쁘다. 시골 내려가 산을 보고 풍류나 즐긴다는 고상한 생각은 1년만 살아보면 답이 나온다.



나더러 감기 앓느라 고생했다고 미루네가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점심을 사주며 제발 좀 쉬라는데 밭에 수북한 잡초들이 씨가 여물어 가는 광경을 보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 부부도 준공이 가까운 공장의 막바지 공사, 양산에서 제작하는 거대한 발효탱크, 미루의 효소강연과 약초차 보급 운동으로 우리보다 몇 배 분주하다. ‘우리 딸들’ 중에서 ‘아빠 딸’이라 불리는 미루를 만나면 보스코가 유난히 좋아한다. 지난 몇 해의 극심한 시련, 공장신축의 갖가지 난관 중에도 잘 버텨주는 미루와 이사야가 고맙다.


마을에서 휴천재로 올라오는 길을 농약병과 비닐 조각이 너저분하던 쓰레기장에서 꽃길로 바꾸긴 했는데, 잡초는 뽑고 꽃은 계속 심는 일 역시 큰일이다. 어제 하루 종일 쉬어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데다 미루가 사준 점심으로 기운을 차렸으므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나는 사람을 위해서, 또 내 자신을 위해서 오늘도 돌담에서 커 내려오는 가시덩쿨들을 낫으로 쳐내고, 꽃이 진 양귀비 대궁과 잡초를 잘라내는데 고맙게도 드물댁이 놀러 나왔다가 거들어 준다. 베놓은 풀을 끌어다 버리고, 감나무가지로 마을길을 비질해준다.



우리 텃밭을 보더니만 지난 봄 노랑꽃을 안겨주었다가 씨를 맺은 갓을 베어낸다며 장갑을 끼고 낫질을 하다 그만 우리 밭을 통해 광수아저씨 논으로 물을 대는 호스를 찢어 우리 채마 밭이 물바다가 됐다. 광수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또랑으로 흐르게 해 놓으라’는 전갈. 남의 밭을 지나 물길을 내면서도 밭주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법이 없고 그냥 ‘물이 없는데 어째? 남의 밭을 지나서라도 물은 받아야제’ 그래서 우리도 ‘밭에 여문 곡석 베다 호수 좀 찍을 수 있제 뭐!’하는 당당함을 보일 수 있는 게 시골인심이다.


드물댁은 한길가 새 집에 사는 ‘서울댁 아줌마’(나를 부르는 호칭은 ‘이층집 아줌마’)를 자주 돕는다. “어저께도 고추밭 김매줬어. 오늘 서울서 자석들이 한 차 왔드만, 지그 보리밭에 익은 보리는 손도 안 대고 돌려보내더만, 내보고 낼 보리 베달라카지 않나!”라며 속상해 한다. 시골 할매들이 ‘아깐 내 새끼’는 일 안 시키고 귀촌한 이웃 젊은 사람들을 부려먹는 짓은 전형적인 얌체행동이다. (요양보호사들이 간병하러 노인네를 찾아오면 자기네 텃밭 지심매는 일부터 시킨다는 얌체짓은 신문에도 났다.)



우리 부부는 이곳 함양에 내려와서 제일 큰 선물로 ‘평화’를 얻었다. 오늘 공소 예절 후에 만난 ‘평화의 여인’ 윤주옥(‘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의 기둥)과 그미의 일행을 보면, 잡초가 난 흙이 어느 새 비옥해져 있듯이, 풀뿌리처럼 이 사회를 비옥하게 만드는 운동가들이어서 참으로 기분이 좋다. 집으로 초대하여 다과를 나누며 번개팅을 하는데 나눌 얘기가 참 많았다. 


요즘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렇게 일본 등의 외세를 업고 국민을 짓밟아온 보수세력이 발악하며 사회가 도대체 안 바뀐다고,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처럼 아무것도 안 된 채로 정권이 넘어가면 어떡하느냐는 탄식이 사방에서 나온다. 최소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좋은 징후다. 우리가 사회를 구체적으로 바꿀 방업은 선거에서 하는 투표밖에 없음을 기억하고 나부터 뭘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해보자고 조언하는 중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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