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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은 남이 넘보지 못하지만 자기도 그 안에 갇히는 장벽
  • 전순란
  • 등록 2019-05-31 12: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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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30일 목요일, 맑음



아침기도를 하자는데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창밖을 내다보며 '여보, 왔어!‘ 란다. 주어가 없이 한마디 동사로 표현해도 알아듣는 사이가 부부다. 그의 찬탄어린 어조, 설레이는 표정, 행여 쉬이 가실까 염려스러운 눈빛, 조용한 말소리는 손님이 눈에 띄는 걸,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다. 나는 즉시 내가 취할 행동으로 나간다. 카메라를 들고 가능한 한 그의 눈에 뜨이지 않게 앵글을 잡는다. 백로가 왔다! 


구장네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한 뒤로 개구리의 합창경연대회가 밤을 꼬박 새고도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지친 순서대로 조용해진 아침녘에 백로가 식사를 하러 왔다. 개구리가 식탁에 올랐는지 우렁인지 미꾸라진지 뭔가를 부지런히 삼키는 긴 목을 보면서 무얼 먹고 있을까 가늠해 본다.


저렇게 소박한 식사를 하면서도 백로는 80여년의 수명을 누린다니 저 백로는 아마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해마다 초여름이면 이 비탈의 다랑논에 와서 아침식사를 하며 혼자 중얼거릴 게다. ‘예전에 저 집에 노부부가 살았지. 내가 나타나면 경이롭게 쳐다보고 사진기를 들고서 숨어보는 척했었지. 다들 떠났지만...' 


요즘은 휴천재 주변에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박새, 직박구리, 물까치들의 하루하루를 경이롭게 감상하고 있다. 어제까지 어미만큼, 아니 어미보다 더 큰 새끼 직박구리가 입을 쩍쩍 벌려 먹이를 받아먹었는데 오늘은 모두 둥지를 떠나고 없다. 텅 빈 집을 망원경으로 새들을 찾던 보스코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 직박구리네 식구가 섭섭했나 보다.



다음번 느티나무독서회에서 읽을 책이 문영석 교수님의 「FUTURE. 교육혁명으로 미래를 열다」여서 다시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50페이지씩 꼼꼼하게 줄쳐가면서, 빈칸에는 느낌도 적으며 읽어 가는데 정말 재미있다. 


더구나 문교수님의 글솜씨와 충실한 내용이 '참 좋은 책이다!' 감탄하다가. 나야 신학을 공부했고 보스코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왔으니 이해가 가능한데 다른 친구들이 애를 먹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도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읽은 아우님들인데 싶어 ‘이런 책에 도전하는 사람이 반만 되도 성공이다.’ 라고 스스로 안심하련다.



‘감기가 준 휴가’를 즐기며 침대에서 딩굴거리고 종일 새로 도착한 너댓 권 책을 읽다보니 저녁이 다 됐다. 보스코에게 제동댁 집이 얼마나 올라 갔나 둘러보러 동네 한 바퀴를 돌자고 했다. 우리 집을 빼놓고 지난 30년간 새 집 한 채 오르지 않던 문하마을에 요즘 들어 새 집이 세 채째 들어서는 중이다. 대처에 나가 사는 자녀들이 고향을 지키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헌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어드리는 참이다. 


제동댁은 워낙 좁은 터에 집을 짓다보니 2층을 올리고 있었다. 뒷집이 답답하겠다고 보스코가 걱정이다. 그런데 뒷집은 얼마 전 새집을 지으며 옆집과 맞닿는 나즈막한 담을 한길이 넘도록 쌓았다. 평상시 ‘담 넘어로 잔소리하던 할매 보기 싫어서!’라는데 자기는 그 높다란 담이 답답하지 않을까? 우리 휴천재처럼 담도 대문도 없고 본체 출입문도 거적문처럼 늘 열려 있어도 도둑도 찾지 않는 게 이 동네 인심이다. 담은 남이 넘보지 못하게 막는 벽이지만 자기도 갇히는 벽이기도 하다. 



날이 어둑해 가는데도 구장댁은 '이억년 묘소' 아래서 밭을 일구고 있다. 참깨를 심었는데 새들이 용케도 부리로 뒤져 빼먹은 자리에 참깨를 다시 심는단다. 오전 내 못자리에서 남편과 함께 모판을 지어 연화동에 모심을 준비를 하더니만 해거름까지도 허리 펴고 쉴 틈도 없는 게 산골의 오월이다. 


그 옆에서는 유영감님이 기계도 못 들어가는 손바닥 만한 다랑논에 손으로 벼를 꽂고 있다. ‘그렇게 심으면 쌀이 얼마나 나오나요?’ 물으니 '몰러. 한 말이나 나올지. 땅을 놀릴 수는 엄고. 내도 그냥 놀면 뭐해. 이거라도 해야 안 심심하지.' 사실 일을 않고 논다고 해도 그분과 놀아줄 사람이 없다. 동네에선 죽마고우들이 ‘죄다 죽어 삐려 사람이 엄서!’라고 한탄하신다.



테라스 둥근탁자에 밥상을 차리고 지리산을 건너다보며 저녁을 먹는다. 평화로움과 행복이 늦은 봄날 산공기처럼 우리 둘을 감싼다. 부부가 건강하게 해로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멀리서 백로 두 마리가 아랫마을 솔숲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내려다보면서 성무일도로 하루를 마감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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