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3일 화요일, 맑음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는 핑계로 아침잠을 더 자려는데 2층 서재 뒷문 계단에서 드물댁이 날 부른다. 아침 일곱 신데 해가 왕산 위 구름위로 덜렁 올라앉아있다. 오늘 가을무와 배추 심을 밭을 만들러 온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서 얼른 얼굴을 씻고 야쿠르트만 들이키고서 텃밭으로 내려갔다.
드물댁은 벌써 얼굴이 벌개질만큼 힘을 들여 괭이질을 하고 있다. “난 혈압이 있어 낮에 떠워지면 일 몬해. 일릉얼릉 하고 집에 가야 해.” 자기는 땅을 괭이로 엎을 테니 나보고는 거름을 내란다. 지난봄 인규씨가 한 차 실어다 준 소똥거름이 한 해 폭 삭아서 좋은 냄새가 난다. 바퀴 달린 바구니 구루마에 가득 소거름을 퍼다 밭에 중간중간 부어 놓으면 드물댁이 괭이로 섞고 둔덕을 올린다.
땅이 비 오듯 쏟아지고 눈앞이 아득해질 즈음, 밭고랑 세 개가 완성됐고 검은 비닐로 멀칭을 한다. 나는 앉아 호미로 비닐자락을 묻고 그미는 괭이로 하는데 내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만큼 빠르다. 나는 아마요 그미는 전공 아닌가?
비닐 반쪽을 먼저 묻고는 둔덕에 걸터앉아 내가 따라올 때까지 이바구를 한다. 본디 괭이로 밭을 뒤집고 거름을 나르고 이랑을 만드는 일은 서방이 하는 몫인데 내가 드물댁이랑 해내겠다며 보스코를 말린 참이다. 내가 변명 겸 “우리 남편도 심장수술(사실은 시술)하고선 덥거나 힘들면 큰일나니 일시키지 말래서 내 혼자 하려니까 힘드네요.” 하니 “이 꼴짝에 서방이 도와주는 여편네 하나도 엄다. 거문굴댁도 지가 혼자 일을 다함시로 냄편만 살아있으믄 업고 다니겄다 해싸. 어제 몬 봤어? 마을회의를 해도 여자 열 댓에 남자는 딸랑 세 개 아니드나?”
한 마을이라도 누구는 죽은 남편이 새록새록 그리워지면서 ‘살아있으믄 업고 다니겄다’고 한숨짓고 다른 여인은 이제 서방 얼굴도 잊어 버렸는데, ‘냄편이 아닌 웬수’로 기억난단다. ‘소올댁 어르신이 굶는 애들 먹이라고 보리쌀 두 되, 쌀 반 되를 주시는데, 논에 갔다 와 밥하려고 곡식을 찾으면 남편과 함께 없어져 버려. 전빵집(동네 가게)에 그걸 갖다 주고 소주랑 바꿔먹고서 불콰하니 돌아오는 꼴이라니! 때려죽이고 싶었어. 그러다가 술뼝으로 세상 비리고 나니 속이 씨언했어.’
중간에 보스코가 냉장고 생수와 오미자와 빵으로 새참을 들고 내려왔고, 11시 반에 멀칭까지 끝나고 나니 내 얼굴도 빨갛게 익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옆동네 80세 안노인이 밭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들은 터.
밭에 남은 작은 고랑 둘은 드물댁 자기가 알아서 부치겠다 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기 땅이 도무지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마을이 작은 공동체여서 고랑 한두 개 내주어도 시샘을 피해가기가 힘들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후끈거리던 얼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얼음냉찜도 하고 오이도 붙여 보지만 별무효과다. 이렇게 해서 여름이 지나면 시골아짐들 얼굴에 기미도 끼고 까만 얼굴들에 두 눈만 더 까맣게 반짝이는 처지가 된다. 우리 엄마로 대표되던 얼굴. 250평 농사로 이렇게 엄살인데 7, 800평 농사를 짓던 시절의 엄마가 생각난다.
비가 한번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훤히 침실을 들여다본다. 그 사이로 파란 하늘에 끊임없이 빛으로 손짓하는 별들도 보인다. 오늘 오후에 읽었던 물리학자 김상욱의 책 「떨림과 울림」에서 어느 빛은 100년 전, 어떤 것은 100만 년 전, 또 다른 것은 100억 년 전에 출발하여 지금 내 눈에 도달한단다. 멀리서 온 것일수록 더 먼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다니…
이렇게 현재 순간에 내가 100억년 전 과거의 우주를 보는 셈이다. 볼수록 신비한 세상이고 살아갈수록 신기한 인생이다, 그 짤다란 햇수를 살고가면서 부부는 부부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저리도 아웅다웅이니 하는 말이다. “그것도 세월이라고 갑디다.” 탄식들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