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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 [사건과신학] 원불교의 마음공부
  • 원익선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9-26 11:55:20
  • 수정 2019-09-26 11: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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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바캉스’입니다. - 편집자 주 



원불교의 기원은 1916년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깨달음이다. 1924년에는 익산에 성불제중(成佛濟衆, 부처가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을 향한 교단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8년 원불교로 개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는 개혁불교이자 현대불교다. 일제의 억압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박중빈은 자수자각(自修自覺,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음)하여 민족의 앞날을 희망으로 비추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어 인류 문명의 미래를 바르게 인도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 즉 인류를 낙원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길은 다름이 아닌 마음공부다.


박중빈은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大宗經)』 제11요훈품(要訓品) 제1장)라고 설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공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삶은 인간의 마음이 운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을 짓는다고 하자. 그 건물의 원모습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계도로 나타나고,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건축된 것이다.


인간관계 또한 인간의 마음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삶에서 경험하는 희비애환은 마음의 다양한 모습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명은 인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찬란한 예술 문화는 인간의 마음이 아름다운 미적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철학과 종교 또한 진리와 선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증오가 상대방을 절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다. 원효(元曉)대사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일심(一心)으로 표현한다. 마음에서 일체가 생성되고, 일체가 소멸된다. 마음은 마음먹기에 따라 좁쌀보다도 작기도 하지만, 우주를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마음의 묘한 작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러한 마음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자는 마음공부가 유행하고 있다. 다양한 명상체험이 아울러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전횡에 따라 인간의 자아가 왜소해지면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존재 자체가 물적 조건에 흔들리며, 존재 자체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본다. 마음공부나 명상 모두는 인간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종교인 원불교 또한 이 점에서 마음공부를 하나의 종교적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초기교단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법연구회는 전통적 불교가 위기 때마다 실천한 결사정신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 결사야말로 재가, 출가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주경야독, 반농반선(半農半禪, 하루의 반은 생산활동에, 반은 수행에 집중하는 것)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 생활에서 마음을 찾고, 마음을 가꾸며, 마음을 활용하는 마음공부를 했던 것이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 경험을 기반으로 교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확대되어 정착되었다. 나아가 현대문명의 근본문제를 치유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는 원불교 마음공부가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나(我)와 경계(境界,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부딪히는 모든 상황을 말함)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식에서 촉발되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경계에 부딪혔을 때, 그 경계를 계기로 나의 본성인 불성(佛性)을 청정하고도 온전한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STAR 마음공부’라는 것이 있다. S: Stop (멈추기) 온전한 정신수양, T: Think (생각하기) 생각으로 사리연구, A: Act (실행하기) 옳고 그름을 취사하기, R: Review (반조하기) 주의할 것, 이라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이것은 원불교의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라는 삼학과 함께 그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검토하는 반조공부가 곁들여진 것이다.


이 삼학은 불교의 전통적인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근본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수행은 견성(見成, 불성을 찾아 회복하는 것), 양성(養性, 부처의 삶이 되도록 불성을 잘 기르는 것), 솔성(率性, 실생활에서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목표다. 결국 이 불성을 깨달아 부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 불성은 모든 사람이 고유하게 품고 있으며,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근본적 요소가 된다. 여기에서 불법의 평등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불성과 성품은 같은 뜻이다. 단 성품은 불성을 품고 있는 마음이다. 마음은 불성을 기반으로 하되 온갖 번뇌로 뒤덮여 자신의 업(karma)을 쌓아가는 불성의 외피다. 이 마음은 진리와 연계된 불성과는 달리 경계를 만나 발현된 파편화되고, 단절된 자기중심주의로 이끄는 원인 제공자이다. 불성은 이러한 마음의 독단에 끌리지 않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세계다. 이 불성의 성격이 현실에서 그대로 작동되면 부처의 삶이 된다.


예를 들어 무시선법(無時禪法)이라는 원불교 수행의 최고 단계에서는 “진공(眞空)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라고 한다. 우리의 불성이 완전히 비어 있음을 알게 되면, 어떤 경계에도 걸림이 없게 된다. 즉 맑은 호수에 기러기가 날아가도 호수에 파도가 일지 않듯이 불성에는 어떤 파도도 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으로 대하는 모든 존재는 각각 절대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즉 인간과 자연 모두는 그 하나하나가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처처불상(處處佛像, 모든 존재는 부처로 현현해 있다는 뜻)은 이를 말한다. 진공묘유는 불성의 또 다른 성격이다.


무시선법의 핵심은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고 가르치는 『금강경』(대승경전의 하나로 선종에서도 활용되는 경전)의 핵심 내용이다. 즉 우리 성품의 근본 자리에서 경계를 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어떠한 평지풍파도 나의 삶에서는 객관화가 된다. 희로애락에 끌려다니지 않는 청정무위(淸淨無爲, 마음이 청정하여 힘쓰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삶이 영위되는 경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무시선법은 “우리의 몸인 육근이 일이 없을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일이 있을 때는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한다. 일심은 깨어 있는 마음, 번뇌로부터 해방된 마음, 우주와 하나 된 마음이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핵심은 “일상수행의 요법 9조”에 잘 나타난다. 이 가운데 1, 2, 3조는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2: 어리석음, 3: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2: 어리석음, 3: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2: 혜(慧), 3:(戒))을 세우자”이다. 이는 일상 속에서 삼학수행을 하는 것으로, 앞의 무시선법과 상통한다. 심지라는 것은 마음이 의지해 있는 근본, 즉 거의 같은 의미인 불성, 성품, 자성을 말한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불성에는 원래 없다. 이를 자성삼학이라고 한다. 중국 선종의 6조 혜능(惠能)대사의 행장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일찍이 확립된 선사상이다. 원불교는 이에 더 나아가 마지막 9조“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라고 하여 마음공부의 범위를 사회로 확장하고 있다.


원불교는 오늘날 다양한 현대불교와 같은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즉 인간 개개인의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부조리와 불의를 물리치고 부처들이 사는 불토 낙원으로 변화시키자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에 속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마음을 통한 개혁 또는 개벽을 주장한다. 즉 마음공부가 근본 동력이다. 그 핵심은 불성의 다른 모습인 공적영지(空寂靈知, 공한 가운데에도 신령하게 아는 것)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삶과 문명은 이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물론 원불교 수행은 ‘평상심이 도’와 같은 선사상과 ‘단전주(丹田住)’와 같은 전통 선법도 계승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원불교야말로 기존의 불교교의를 통합 활용하는 회통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진공묘유 또는 공적영지한 성품을 최근 일부에서는 ‘메타마음(Meta-Mind)이라고도 한다. 어떤 형태로 표현하든 그 최종에는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法身佛, Dharma-kāya-buddha, 부처를 부처이게끔 하는 근본 부처이자 우주의 근본 진리)의 진리로 귀결된다. 앞에서 언급한 불성 또는 성품은 곧 법신불의 속성이며, 인간 누구나 이 법신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깨닫게 되면, 무명(無明, 마음이 밝지 못하여 죄업을 짓게 되는 마음)을 벗어나 법신불과 일치가 되는 것이다. 법신불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법신불의 상징은 또한 원불교를 상징하는 일원상(一圓相)이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 근본 진리와 합일하여 진리적인 삶, 즉 부처의 삶을 살며, 이 지상을 불국정토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된다.


현재 원불교 내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STAR 마음공부’만이 아니라, ‘정전 마음공부’, ‘온삶 마음공부’, ‘알아차림 마음공부’ 등 다양한 마음공부의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어떠한 마음공부든 최종적으로는 이 법신불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다르게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익선(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정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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