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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정당한가?
  • 손원영
  • 등록 2019-10-10 18: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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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한국교회 총회’입니다. - 편집자 주 



매년 9월 중순쯤에는 한국교회의 주요한 교단들이 총회를 열고 있다. 그런데 이 때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소위 ‘이단’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각 교단들은 총회를 열어 이단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예컨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장로교 고신측 교단은 이단 문제와 관련하여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옹호단체 규정 및 전광훈 대표회장 이단 옹호자 규정 건,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의 이단성 연구, 미주 세이연(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 및 이인규 씨 관련 이단성 조사 청원 건, 그리고 뉴스엔조이 건 등을 심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필자가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 한 SNS상에서는 고신측 이단 논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활발하다. 논의의 내용인 즉슨 고신측 교단이 작년 총회 때 이단성 혐의가 있다며 국내의 몇몇 유수한 선교단체들을 조사하겠노라 발표하였는데, 그 중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의 김요한 목사에 대한 조사 건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 고신측 교단에서는 그에 대한 이단성 조사를 잠정 ‘유예’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작년에는 고신측 총회가 가장 먼저 김 목사의 활동에 이단성이 있다고 발표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다른 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었는데, 올해는 다른 교단의 추이를 보면서 그 논의를 진행하겠노라며 슬쩍 빠지려는 형국이다. 고신측 교단의 이런 행태가 과연 책임 있는 교단으로서 적절한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단 논의는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다. 왜냐면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을 결정하는 일은 교회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중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것이 자칫 인권침해의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김요한 목사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작년에 그의 책 <지렁이의 기도>가 문제가 되어 고신측 교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교단들에게서 이단성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아마도 큰 심적 고통을 겪었으리라. 솔직히 상상만 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그는 내가 아는 한 현재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음전파를 위해 척박한 신학관련 출판시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문서선교사로서, 특히 건전한 신학사상의 확산을 위해 <새물결아카데미>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칭찬은 고사하고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단시비의 굴레가 씌워졌으니 참 아이러니할 뿐이다. 이것은 매우 비인권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이단성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사건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건의 요지는 2016년 1월에 있었던 김천 개운사 훼불 사건이 그 배경이다. 한 개신교인이 불상은 우상이라며 개운사 법당에 들어가 법구를 모두 훼손하고 또 주지 스님에게 폭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 때 필자는 불당을 훼손한 사람과 같은 한 개신교인으로서 불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고 불당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빌미로 하여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측은 필자를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며 교수직에서 파면 처리하였고, 현재는 그 문제로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법원의 최종 판단이 어떻게 날지 매우 궁금한 일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필자의 심적 고통은 참으로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정통이란 이름으로 혹은 교단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이는 다행히 중세시대처럼 화형과 같은 극단적인 처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격살인과 같은 큰 심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단 결정과 관련하여 필자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교단에서 누군가를 이단으로 정죄할 때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신중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생활하는 현실에서 법이 정한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신학적 문제가 있다면, 먼저 그에 대한 이단정죄 이전에 그 문제와 관련하여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허심탄회하게 신학적 토론을 하는 것이 순서이다. 아마도 이 일을 위해서는 대학이나 관련 학회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크다고 본다. 만약 이러한 토론이 배제된 채 이단 결의에 이른다면, 그것은 아무리 교권을 갖고 있는 교단의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지난 2천 년 동안 어느 한 신학적 논의가 교회에서 교리적 정당성을 얻거나 혹은 이단으로 정죄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신학적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초기 공의회에서 잘 나타난다. 즉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탄생되기까지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고, 또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은 “혼동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으며, 분할이 없다.”고 결정되기까지 수많은 학파들 사이에 긴 논쟁이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교리가 정당성을 얻기까지 치열한 신학적 토론은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단순히 한 2-3일 정도의 짧은 총회를 통해 누군가를 이단으로 정죄하기보다는, 그 전에 대학 등에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견해를 달리하는 모두가 자유롭게 참여하여 심층적으로 대화하는 신학토론의 절차를 반드시 거처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교리적 이단과 윤리적 이단을 신중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교리적 이단이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위일체교리나 예수의 양성교리와 같은 교리적인 문제에서 이단성이 있는 것이라면, 윤리적 이단은 폭력이나 사기 사건과 연루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회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리적 이단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학적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매우 신중히 이단을 결정하고 또 정죄해야 한다. 왜냐면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며 등장한 루터의 개신교도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당시 이단이었고, 또 개신교를 포함한 수많은 이단들이 후에 정통으로 변화된 경우도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적 이단에 대해서는 가급적 ‘관용’(tolerance)의 정신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이단들은 주로 교리적 이단의 경우보다는 윤리적 이단의 경우가 훨씬 많고 그 악영향이 매우 크다. 왜냐면 그들은 종종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또 건강한 가족을 해체시키거나 혹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비윤리적 행태에 의해 한국교회는 소위 ‘개독’으로 몰리기도 한다. 특히 최근 불법적인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세습문제나 목회자의 비윤리성 등은 적어도 교리적인 이단은 아닐지 몰라도 철저하게 윤리적인 이단으로써 교회로부터 정죄되어야 마땅하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공의를 실천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거나 혹은 이웃사랑을 충실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모두는 윤리적인 이단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히 경계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제일 경계하며 비판하였던 대상 곧 이단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엄밀히 말해 교리적인 이단이 아니라 윤리적인 이단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23:3) 따라서 한국교회는 누군가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우리 자신이 혹 이단이 아닌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손원영(서울기독대 해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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