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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다툼 속의 악당 만들기
  • 정준희
  • 등록 2019-11-07 11: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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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YouTube와 한국사회: 가짜뉴스VS진짜뉴스?’입니다. - 편집자 주


언론이 왜 그랬을까?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아니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언론의 공세에 대해 많은 이들이 품는 궁금증이다. 심지어 내 주변에 있는 언론학자들조차 내게,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언론은 왜 그런 걸까?


첫 번째 가설은 전적으로 조국 전 장관에게 책임을 돌린다. 실제로 그가 문제가 있어서, 혹은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라는 거다. 한 계절을 통째로 털어 넣을 만큼 전례 없는 압박, 70곳이 넘는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펼치고 나서도 무엇이 결정적인 범죄의 증거인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해도 그렇다는 거다. 적어도 그는, 그리고 그를 임명했던 청와대는 ‘과거 같았으면 지명을 포기하거나 진작 낙마시켰을’ 이른바 도덕성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레 그 자리를 고수했으니, 권력을 감시할 책무를 지닌 언론이라면 마땅히 권력 감시와 진실 추구를 위해 불철주야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가설의 존재의의를 수긍한다고 해도, 작금의 상황에 대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이번 건에 있어서는 유독 이렇게 집요했을까? 왜 조국 전 장관 이슈에 있어서만큼은 그 흔한 언론의 정파적 지형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오로지 부정적 의혹 중심의 보도가 쏟아졌고 공격의 강도가 높았던 걸까? 그럴 정도라면 조국 전 장관은 이미 전대미문의 부정부패와 심각한 범죄의 주체로서 입증되었어야 마땅할 텐데,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격에도 못 미치는 지금 상황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검찰이 던지고 언론이 쫓아간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말 그대로 ‘마땅히 문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문제로서 다루어진’ 이슈를 하나하나 제외하고 나면 손에 쥐어지는 것조차 몇 개 없다. 끔찍하지 않은가? 주요 공직에 있는 사람이어서, 법을 다루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서 본인과 그 가족들까지 그 정도로 집요한 인신공격을 감수해야 한다면 의연히 버텨낼 자가 하늘 아래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두 번째 가설은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단순한 권력 관념이 아닌 한국 사회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크고 작은 권력과 이들 사이의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이라는 시각을 필요로 한다. 청와대가 민정수석과 법무부장관, 그리고 검찰총장을 거쳐 정치적 적대자나 이른바 ‘거악’에 대해 칼을 휘두를 때에는 그들이 하나의 권력 안에 일체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것이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명백히 입증한다. 검찰총장이 민정수석과 대립하고, 그의 법무부장관 선임을 음으로 양으로 가로막고 나섰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은 고사하고 대통령조차 검찰총장을 통제하지 못한다. 검찰이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는 수사를 벌이고 있어서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야당 대표나 국회의원의 비위 혐의나 범법 사실에 대한 수사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까? 그런 와중에서도 검찰과 검찰총장 개인에게 던져진 의혹에 대해서는 전광석화처럼 방어적 공격성을 드러내는 걸까?


검찰이 단순히 행정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독자적 권력이라는 사실이 가시화되는 순간, 언론 역시 또 다른 권력으로서 이 난장판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언론은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한다. 이들에게 주어진 ‘공직자에 대한 검증’이라는 명분은 자신의 영향력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더없이 유효한 무기이다. 그리고 이들의 무기는 주요 공직자를 ‘낙마’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생각해 보라, 어떤 공직자에 대한 검증 결과가 ‘의외로 좋은 사람이더라’라든가 ‘공직을 수행하기 적합한 역량을 갖고 있더라’라는 식으로 연결된다면 얼마나 맥이 빠지겠는가? 그 역시 분명히 검증의 중요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론일 뿐이다. 모름지기 검증이라면 ‘나쁜 놈’을 걸러내는 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악당이 없는 영웅서사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악당이 되어주어야 한다.

 

서사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조국 전 장관은 악당이 되어주기에 더없이 좋은 캐릭터였다. 수려한 외모와 엘리트적 커리어, 이른바 ‘강남좌파’라는 꼬리표, 자신의 계층적 기초를 배반하고 약자를 위해 과감한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아왔던 행보로 인해, 그와는 전혀 다른 민낯을 노출시켰을 때의 극적 효과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 재료가 없지 않았다. 게다가 검찰이 뒷배가 되어줬다. 큰 싸움이 시작되면 누군가 목이 잘리거나 무릎이 꿇려져야 한다. 과거에는 청문회를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이 앞장서고 언론이 뒤따르는 방식의 싸움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정치는 뒤로 빠지고 언론이 앞에 섰다. 그리고 의혹을 범죄 사실로 바꿀 조사권과 수사권 그리고 기소권까지 갖고 있는 검찰이 뛰어들었다. 검찰은 심증이 마치 물증으로 확인된 양 행동했고, 언론은 이를 무한증식 시켰으며, 정치는 그것을 사회적 갈등과 대립으로 만들어주었다. 공직 후보자를 성공적으로 낙마시키면 그 공로를 인정하여 표창장을 주어왔다는 야당 원내대표의 천진난만한 발언, 그리고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이른바 ‘장이 섰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썼던 언론의 모습 속에서 이 난장판의 본질이 결국 공직자의 도덕성과 진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권력들 사이의 헤게모니 다툼에 불과했다는 것을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그 결과로 무엇이 남았을까? 우리 사회의 공직자 윤리에 대한 감수성이 제고되고, 좀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고양되었을까? 검찰과 정치와 언론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입증되었을까? 도리어 그 반대가 아닐까? 공정함과 정의는 한갓 허울일 뿐, 우리 사회의 공공기구를 구성하는 주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결국 각자의 이익과 그것을 보호해줄 영향력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명확히 확인하게 되지 않았을까? 정작 까밝혀진 것은 천사의 얼굴을 했던 악당의 민낯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는 크고 작은 권력의 역겨운 맨얼굴이 아닐까.


정준희(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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