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19.12.25) : 이사 52,7-10; 히브 1,1-6; 요한 1,1-18
무엇이 아름다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이렇게, 예언자의 눈에는 복음을 전하는 이의 발조차도 자연현상의 온갖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나봅니다. 예언자 특유의 낙관적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여, 당시 자신이 속했던 남유다왕국의 비관적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이사야의 표정이 우리 눈에 선합니다. 희망의 예언은 더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쁜 소식을 들으라고 전하는 대상이 ‘예루살렘의 폐허’라니요? 폐허가 되리라고 전제하는 저주의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이사야는 머지않아 일어날 남유다왕국의 멸망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듯이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하며 환성까지 올려도 좋다는 것은 그 멸망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이 바로 그 오백 년 후에 이루어질 메시아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서 평화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 아름다우리라고, 심지어 그 소식을 전하느라고 이 산 저 산으로 힘들게 다니게 될 그 사람의 발마저 아름다우리라고 경탄했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당시가 아니라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메시아가 오시고 나면 그분의 메시지를 알리고 다닐 메신저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예언이었던 겁니다. 당대보다 훨씬 후대에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할 교회를 두고 한 말인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다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교회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인 겁니다. 이 아름다움은 역사적 비극과 불행을 딛고 오신 메시아에게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고, 다시는 이런 비극과 불행이 없으리라고 위로하는 아름다움입니다.
빛과 어두움, 그리고 창조의 두 차원
메시아는 어두운 세상에 비추어진 하느님의 빛이십니다. 마치 태초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던 혼돈의 어둠 속에서 창조의 빛이 비추어져서 온 우주가 생겨나 지금까지 팽창하고 있듯이, 메시아께서 비추시는 그 빛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지 벌써 이천 년이 넘었지만 메시아에 의한 새로운 창조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창조된 세상과 문명조차도 메시아의 그 빛 앞에서는 어둠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마치 지구에 사는 우리 눈에는 태양이 빛의 실체로 보일 뿐이지만, 그 태양도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서는 촛불보다 더 희미한 존재에 불과한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빛은 낮에도 구름이 가리어지면 흐려지고 밤에는 지구 반대편만 비출 수 있을 정도로 그 한계가 뚜렷한 빛인 겁니다. 그래서 이토록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해진 세상을 두고, ‘세상의 어둠’을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편리해진 물질문명의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 이 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신비를 상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물리적인 차원에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고 이 빛으로부터 우주가 생겨났고 그 안에서 지구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지구에서 생명체가 생겨나 진화를 거듭한 끝에 인간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의식이라는 능력으로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의 총화가 문명이요 이 문명의 요체가 언어와 문자였습니다. 이 점에서 인류는 놀라운 속도로 문명을 발달시켜왔고 이 가속도는 점점 더 붙어서 과연 인류 문명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런데 문명의 성적표는 경제 규모나 과학기술의 편리함에서만 매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척도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아무리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생활이 편리해졌다 하더라도 그 문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실로 문명의 발달 방향은 의식주를 해결하고 그 다음 안전을 도모하며 그리고 관계의 질을 향상시키려 하고 나서는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점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특성이며 결정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기를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시작하신 이유와 목적이기도 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으로부터 인류 문명은 영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빛을 맞이했습니다. 이 빛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의 제1장이 물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창조의 사건을 진술하고 있다면, 오늘 들으신 요한복음의 제1장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창조의 신비를 일깨워줍니다. 물리적인 창조 사건에 이미 숨겨진 배후이기도 하고 근본 원인이기도 했던 말씀의 정체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빛이 서양에서 왔는가?
물리적인 창조의 결실로 생겨나서 영적인 창조의 세례를 먼저 받은 것은 서양문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문명의 두 축은 그리스적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적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입니다. 고대에 그리스도교화된 서양문명은 중세에 이르러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슬람의 문명과 교류하게 되면서 근세 이후에는 물질문명은 물론 정신문화에 있어서도 동양을 압도했습니다. 정치와 경제, 군사와 과학기술 그리고 학문과 예술에 있어서까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까지 포함된 전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성적표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학문은 있으나 지혜는 없다. 기술은 있으나 정신적 에너지는 없다. 공업은 있으나 생태학은 없다. 민주주의는 있으나 윤리는 없다.”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이 서양문명을 비평한 말입니다. 그는 이것이 바로 근대 계몽주의적 이성의 실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하는 인간 이성은 하느님과의 어떠한 관련성도 부인하고, 따라서 아무것도 신성시하지 않으며, 끝내는 인간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내다본 것입니다. 그 징후가 오염되는 환경이요, 파괴되는 생태계이며, 경시되고 있는 생명이고 이 모든 불안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스 큉 신부는 세상을 휩싸고 있는 어둠의 실체를 이렇게 신학자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았을 뿐 내면으로는 속속들이 복음화의 빛을 쏘이지 못한 증거입니다. 현 시기 서양문명은 정치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사조가 풍미하는 가운데 정신사상적으로는 허무주의가 휩쓸고 있어서 서양문명의 본 고장인 유럽의 신앙 열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버린 것도 그 흔적입니다.
구한말 밀어닥친 근대화의 바람은 서양의 사고방식을 한국인들에게 강요했고, 불과 백 년 만에 한국인들은 서양의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물결에서 물질적으로는 열심히 따라붙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능률과 성과를 앞세우고 치열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의 망령 속에서 허무주의의 질병에 감염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지난 이천 년 동안 서양을 거쳐서 오기는 했지만 복음 진리 자체가 서양의 것도 아니고 서양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말씀은 물질주의나 허무주의적 사고방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동양문명이나 서양문명이나 물리적인 창조의 빛에서 비롯된 물질문명은 그 자체로 발달시킨 정신문화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말씀의 빛을 받아서 영적인 창조의 세례를 받아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화의 진정한 지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배웠지만 그 한계를 보고 있는, 그러면서도 동양문명의 정수를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게다가 복음진리야말로 진정한 빛임을 알아보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복음화 소명이 이것입니다.
복음화의 품격
이것은 어둠으로 가리어진 현실을 두고 아무것도 없는 허무라고 단정하지 않고 사실은 빛이 비추어지면 모든 것이 드러날 충만으로 알고, 빛을 비추고자 하는 일입니다. 즉, 어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언가 가득 차 있지만 어두워서 가리어져 있을 뿐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일단 빛이 비추이기만 하면 그동안 가리어져 있었던 많은 것들이 비로소 드러나는 충만으로 기뻐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앞에서, 또 어둠 속에서 양자택일의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본시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어둠인가, 단지 가리어져 있을 뿐인 충만한 어둠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충만주의자로서 허무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희망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성탄맞이는 우선 우리 자신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우리 자신도 메시아를 닮는 은총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지만, 메시아가 비추어주신 그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야 하는 겁니다. 교회의 성탄맞이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과 분야들과 여러 구석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네 의식과 삶과 인간관계와 또 여기서 파생된 모든 세상살이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일 것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복음화의 노력이 모든 개별적 성과들을 넘어서서 거시적이고 근본적이며 문명 차원의 안목을 필요로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복음화의 노력이 얼마나 가치롭고 아름다운지도 알려주기 때문에 성탄의 기쁨에 안주하지 말고 어두운 세상에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라고 재촉하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알려준 아름다움은 복음화의 품격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대적 상황을 넘어서 복음선포의 가치와 품격을 알려준 예언자의 말을 새겨둡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