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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시대’에 걸맞는 인간의 위상을 찾아
  • 이기상
  • 등록 2020-02-10 10: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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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측의 관계축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지금 인류는 절실하게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 인식론적 틀, 창조적 해석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양에서 유래해온 이성중심의 사유는 인류에게 무한한 진보의 꿈을 심어주며 인간의 존재를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점령에로 뻗어나가게 했다. 이제 아마도 76억의 인간에게 이 지구는 너무나 좁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존재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더 넓은 우주에로의 여행이, 다른 행성에로의 이주가 필연적인 미래의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끝없는 공간확장의 욕망과 태도가 존재중심에 사로잡힌 하나의 특정한 존재방식으로서 잘못된 존재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가 되었다. 


존재에 대한 인간측의 관계축을 감성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감각주의자와 실증주의자처럼 우리의 오관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경험의 폭을 더 넓혀, 존재에 대해 인간은 지성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할 경우에도 지성이 놓여 있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 때문에 존재를 다 포용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지성에 바탕한 우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약되어 있지만 무한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갈 수 있는 사유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의 도움을 받아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 전체에서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이성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성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존재를 그 전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에 대응되는 인간측의 관계축은 이성이 항상 맡아 온 셈이다. 그런데 은연중에 우리는 이 관계를 역전시켜 마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성중심의 사유태도와 생활방식 속에서는 존재의 바깥이라 생각되는 무(無) · 공(空) · 허(虛)가 없는 것으로 제외되고 삭제되고 망각되고, 망각된 것이 은닉되어 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반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몰이성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세상에서 내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이성을 둘러싼 현대의 논쟁이 결국 근대성을 둘러싼 논쟁이며 탈근대의 논쟁인 것이다. 현대를 근대성의 미완으로 파악하고 있는 하버마스는 이성개념을 좀 더 폭넓게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성을 떠나 갈 곳이란 비이성, 반이성, 몰이성일 텐데 그것들은 인류에게 더 심한 파국을 안겨줄 뿐 결코 구원의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발견한 것은 이론적 합리성, 도덕적 합리성 그리고 미학적 합리성을 아우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서 < 생활세계적 이성 >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점에서는 하버마스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성이란 곧 ‘생활세계적 이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이란 곧 생활세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로고스 중심적인 서양의 전통 속에서 생활해온 하버마스가 제안할 수 있는 대안적 이성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구적인 생활세계의 산물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한 번 물음을 던져 다른 생활세계에서 다른 형태의 ‘이성’은 없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문화권, 다른 세계에서는 존재에 대한 인간측의 관계축을 무엇으로 보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이성’에서 ‘영성’에로


▲ Kazimir Malevich < Black Square >


우리 한국인의 생활세계에서도 존재를 파악하는 인간측의 능력을 이성(理性)이라 보았다. 그렇지만 이때의 이성을 서구적인 로고스나 ratio나 Vernunft, reason를 번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생활세계의 산물로서 우리 나름의 독특한 ‘생활세계적 이성’에 의해 각인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세계적 이성이 서구적인 이성과는 달리 무 · 공 · 허와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무 · 공 · 허가 존재 내지는 유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을 서구적인 이성과 구별짓기 위해 ‘얼’ 또는 ‘영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을 이성에서 영성에로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릴 때 우리는 현대와 같은 ‘우주적 시대’에 걸맞는 인간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신적인 것이 배제된 철두철미 세속화된 생활세계적 이성에서는 성스러움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한번쯤 현대가 처한 위기는 우리가 내몰아 버린 신성과 싹 쓸어버린 성스러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한국인이 서양인과는 다른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하느님과 관계 맺은 소통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한국인의 존재이해의 지평이 실상은 ‘존재’가 아닌 ‘없음’[무(無)·공(空)·허(虛)]임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없음의 지평에서 파악된 신도 ‘최고의 존재자’나 ‘제일 원인’이나 ‘절대의 존재자’가 아니라, ‘절대공’이나 ‘텅빔’이나 ‘빈탕한데’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한국인이 없음의 지평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생활세계적 이성’ ― 차라리 ‘생활세계적 영성’ ― 이 파악한 다양한 신 개념을 고찰하면서 그 안에 간직되어 있는 신의 독특한 면모들을 제시해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크게 네 가지를 구별하여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하기에 텅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공간(空間)]’와 끝없는 ‘때-사이[시간(時間)]’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다 품고 계시며 주관하는 ‘하나님’, 그리고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온통 전체를 유지·보존하고 끝없는 힘돌이, 열돌이, 숨돌이, 피돌이로써 되어감의 맴돌이와 되삭임, 되먹임하고 이루어나가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즉 ① 텅빈 온통, ②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텅빔 속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생성·소멸·변화의 사건 전체, 그리고 ③ 이 모든 것을 절대적 하나인 온 전체 속에서 운행하시는 신비스러운 힘 그 자체 ― 이러한 세 가지 국면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둘째는 이중 무극만을 떼어내 고찰한 절대공으로서의 ‘하나님’이다. 모든 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텅빔 그 자체를 의미한다. 모든 존재의 밑동과 비롯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가야 하는 ‘하나님’은 ‘한우님’ 또는 ‘한웋님’이라고도 불린다.


셋째는 태극, 즉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되어감의 전개과정, 생성,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하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생명의 차원이 강조되면 ‘한얼님’이라고 불리고, 주재의 능력이 강조되면 ‘한울님’으로 불린다. 


넷째는 흔히 하느님의 마음이라 표현되는 우주의 얼로서의 ‘한얼님’이다. 텅빔 속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얼에 따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서로 교통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인의 독특한 신관이 새로운 정신성,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의 시대에 지구인이 필요로 하는 통합적 신관 구축에 도움이 되리라 희망해본다. 


▶ 다음 편에서는 ‘다석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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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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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20-02-10 16:45:02

    꾸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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