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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 좌표는 어떤 기준에서 시작됐나
  • 황창진
  • 등록 2020-03-12 12: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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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종교, 혐오 그리고 정치-코로나19 사건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 편집자 주


▲ ⓒ 가톨릭프레스 자료 사진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한 몇몇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비관적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엠마오로 가는 도상위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의 삶의 자리라는 좌표는 예수의 죽음과 절망감이라는 x축과 y축의 기준점이 만들어 낸 지점이라고 보여진다. 스승의 죽음과 절망이라는 기준점은 부정적인 좌표를 제공했고 그 좌표 위를 걸어가는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 일단의 한국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좌표는 어떠한 기준점에 의하여 주어진 자리일까? 그 좌표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걸어주시는 예수를 알아차리고 예수님의 의도를 삶의 자리에 구현해 내는 실천을 살아내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의적인 성서해석에 기초한 배타적이고 주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고 있는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후자라고 하는 확신이 강하게 들어온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고 하는 삶의 좌표를 찍어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잣대를 가지고 살아감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삶의 자리로서의 좌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만나게 된다. 2004년의 인도네시아 지진에서 20여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에, 그리고 2011년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재해가 밀려왔을 때 그리고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재앙을 경험할 때에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말로 많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였다. 어쩌겠는가? 우리가 딛고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의적 성서해석이라는 기준점에 의한 삶의 좌표에서는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20년 1월말 이후로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고 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이리저리 경각심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확산되는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일이 그리 수월해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들고 서로를 살피고 조심하며 자기를 정결히 하는 시간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서로를 위하여 이해가 되고 합의가 되는 삶의 자리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때 매우 안타깝고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하고 말았다. 중국 우한에 있는 우리의 교민들이 그 어려운 지경을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우리 가운데 일부가 보인 격렬하게 반대하는 반응이 그것이었다.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보인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중국 우한교민 아산에 오는 것 무조건 반대”라는 구호아래 바닥에 드러눕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정의와 공의,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나그네를 대하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명확하게 반反하는 행동이었다.  


다행히도 양식이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We are Asan” 이라는 SNS운동과 “힘내세요 아산시민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상황을 반전시키고 교민들을 받아들여 안도의 숨을 쉬게 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상황의 기저에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즉 자신의 유리한 상황을 위하여 사회의 분위기를 이용하려는 누군가의 미성숙한 모습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자세와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이러한 엄청난 자연적, 사회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그러한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그러한 재앙에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자의적인 이야기를 쏟아내고, 내부의 이기적인 투쟁에 몰입할 때, 그 무력한 종교는 외면당하고 새로운 종교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시절에 엄청난 전염병이 로마제국 전역을 휩쓸었고 그 후 251년에도 유사한 역병이 로마제국을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오니시우스의 기록에는 “이교도들은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들을 내쫓았고 가장 가까운 자부터 도망을 쳤으며 병자가 죽기도 전에 내다버리고...”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한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역병이 돌 때에 그 역병의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환자들을 돌보는 등 삶을 나누면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야기 했고 이것은 교회와 사회가 애착관계를 형성함으로 이 애착관계는 예수운동이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확장성을 갖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위와 같은 초기의 교회가 살아낸 삶의 자리를 돌아보면 오늘의 교회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떠한 기준점을 잡고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삶의 좌표를 설정하여 제시해야할 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는 건강한 기준점을 잡는 일에 무지無知하고 속도가 느리며, 행여 살아가야 할 삶의 좌표가 제공되었다 할지라도 게으름과 욕심 때문에 좌표를 선점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이 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 이러한 고단한 상황에서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삶의 자리를 설정하고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한 냉정한 판단과 적절한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대응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웃을 수용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건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회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을 쓰는 현재(2020년 2월 10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혼란스럽고 고단한 우리 사회에 그 어떤 식의 힘을 주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 제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다.


교회는 꾸준히 자기의 ‘재-최적화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한 손에는 경전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욕심과 게으름으로 인한 이전투구를 잡고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생명력 있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Text와 Context의 상관관계가 시간과 공간속에서 어울려 건강한 신념과 가치를 생산할 때,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도록 교회가 꾸준히 ‘재-최적화작업’에 자기를 투신할 때, 교회는 현재 경험하고 있는 고단한 상황에 대한 뜻과 의미를 밝혀낼 수 있고 그에 적절한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걷고 있는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며 고난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희망이 된다.



황창진 목사(산돌교회, 협성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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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바닥에 드러누운 아산 주민들',  < 이데일리 >, 2020.01.30


우삼열목사 페이스북


로드니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115쪽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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