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 철학자들은 시대정신을 어떻게 파악했나?
흔히 철학은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고 말한다. 인류사적으로 문제가 가장 많았던 20세기의 시대정신을 고뇌하며 개념으로 잡으려 시도한 서양 철학자들은 많다. 그렇다면 20세기 격동의 한가운데 살았던 한국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잡으려고 버둥거렸으며 무엇이라 파악해냈는가? 세계사적인 문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그 모든 문제들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한국인이 고민하며 주체적으로 사유하여 붙잡은 시대정신이란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함석헌은 생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한국 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들이파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無常)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雜多)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캄캄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은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 시(詩)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⑴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있다, 있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시대 아픔을 개념으로 붙잡아 풀어보려고 노력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이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위대한 사상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그 사람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너무나 높은 데서 너무나 멀리 보고 있기 때문에 먹을 것 찾기에만 급급해 시장바닥만 뒤지던 우리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20세기 서양의 물질문명이 휘몰아가고 있는 지구파괴와 인간성 말살의 위험을 경고한 서양 철학자들은 많다. 그 중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성중심, 존재자중심, 인간중심의 삶과 사유의 방식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 지배의 논리와 그 폐해를 간파하고 새로운 사유에 의한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쫓아낸 <성스러움>의 차원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⑵ 서구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몰아낸 다양한 형태의 무(無)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맺음과 경험만이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은 21세기가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 새로운 정신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⑶ 이제까지는 ‘있는 것’[존재자]과 인간은 이성(理性)으로 관계 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없는 것’[무, 공, 허]과는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성>으로써이다. 이미 서양에서도 오래 전에 신비주의자들은 그러한 영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영성가인 다석 류영모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말로 ‘얼’이다. 우리 자신이 ‘얼’[얼나]이기에 우리는 ‘얼’[한얼, 성령]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다석은 하느님이 거룩한 이유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사물과 인간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없이 계심’의 방식으로 있기에 ‘거룩하다’고 이야기한다. 동양과 한국에서는 눈앞의 자명한 있음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불명확한 <없이 있음>을 더 중시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늘[天]로 표현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거룩함으로 공경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함과의 관계맺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21세기 영성의 시대는 도래 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에게 희망은 없을 것이다. 21세기 이 땅의 지성인들이 해야 할 과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문법에 녹아있는 고유한 한국적인 영성을 찾는 일이다.
셈 생각과 뜻 생각, 어떤 패러다임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가.
존재와 이성이라는 짝지음의 구도에서 벗어나 무·공·허와 그 대칭을 찾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성이다. 이성의 중요 기능인 생각에는 ‘되는[드는]’ 생각과 ‘하는’ 생각 그리고 ‘나는’ 생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계산 가능한 것만을 주로 본다. 그렇지만 생각에는 ‘셈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 생각’도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사유능력에는 셈하는 사유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읽어낼 줄 아는 사유능력도 있다고 하였다. 셈하는 셈 생각, 즉 측량, 계산이 서양에서는 발달하였다. 그것이 과학과 기술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생각에는 뜻을 새기는 능력도 있다. 뜻을 보고 뜻을 읽어내는 생각 말이다. 뜻을 볼 줄 아는 나는 ‘뜻나’이다. 이런 다석의 사상을 받아 들여 함석헌은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를 저술했다.
뜻은 계속 끊임없이 존재의 돔을 씌우는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서양철학의 시작에서 철학자들은 존재의 지평을 ‘이데아’라고 이름하였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실체, 주체, 정신, 의지, 힘에의 의지 등으로 계속 바뀌어왔다.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의 돔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천(天), 도(道), 리(理), 기(氣), 성(性), 심(心) 등으로 이름하였다. 우리 문화와 전통에도 나름의 존재의 돔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존재의 돔을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터이다.
동양과 서양이 교류가 없었을 때는 우리 나름의 존재의 돔을 형성해가면서 다양한 돔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그 중 하나를 택해 뜻을 새겨 넣는 방식으로 우리끼리 우리의 존재의 돔을 계속 수리 보완하는 수준에서 살아왔다. 세계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이 존재의 뜻이다. 인간 삶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뜻이다. 그것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도, 수로 셈해낼 수도 없다.
우리의 육체적인 눈은 존재의 뜻에 의해 얼기설기 짜여진 의미의 그물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눈은 서양화된 존재의 뜻으로 짜여져 버렸다. 동·서양이 만나지 않았을 때는 각자 따로 다른 존재의미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서양이 과학과 기술을 앞세우고 동양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의 존재의 돔인 천(天), 도(道), 리(理), 기(氣), 성(性), 심(心) 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현대는 서양의 존재의 그물망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100년 전 우리들의 삶과 현재 우리의 삶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그 엄청난 존재시각의 차이에 놀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명성황후의 두 번째 왕자는 항문이 없이 태어났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작은 이상(異狀)이다. 수술로 항문을 만들어주어 간단하게 손을 볼 수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양 의사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들을 불러들여 수술만 시키면 왕자의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 존재의 눈으로는 왕이 될 사람에게 칼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아기는 며칠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존재의 눈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누가 그런 병 때문에 자기 아기를 죽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런 부모가 있다면 아마도 형사처벌 감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존재의 시각도 시대가 달라지며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뜻 생각이 어떤 시대에 어떠한 패러다임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유[생각]에는 이처럼 두 가지가 있다.
21세기 이 땅의 지성인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 고유의 한국적인 영성을 찾는 일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는 ‘하는’ 생각의 단계에 만족해서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나는’ 생각의 단계에로 올라가야 한다. 다석의 표현대로라면 ‘뜻나’에서 ‘얼나’로 넘어가야 한다. 있음의 의미를 읽어 낼 줄 알면 없는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서양의 역사는 있는 것의 범위에 들 수 없는 것을 무(無)로 간주하여 없애온 ‘무 제거의 역사’였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없다고 간주되었던 것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무의 반란, 즉 인간이 없다고 여기던 것, 무·공·허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인간이 필요 없다고 내다버린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신, 성스러움, 영적인 것이 있다.
그러기에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필요 없다고 제거해버린 그 신이 다시 도래할 수 있게끔 신을 위한 마당을 마련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신이 도래할 수 있는 그 마당이 바로 성스러움이며 영성적인 것이다. 성스러움, 거룩함(das Heilige)이라는 독일어에는 ‘온전함, 온통(깨지지 않는 전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이성으로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신비스러운 것으로서 비밀 중의 비밀이다. 그것은 알갱이며 심연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심연을 알기 위해 심연을 파헤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심연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산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산을 모두 파헤쳐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산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산을 그대로 둔 채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셈 생각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또는 언어,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간주할 때 그것은 자연히 우리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무·공·허를 멀리 치워버렸다. 그것을 알아보고 경험하던 우리의 능력을 떼어내 버렸다. 21세기 영성의 시대에는 우리가 몰아낸 무·공·허에 대한 경험을 되살려내야 한다.
서양 사람들은 있는 것(존재)에 대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없는 것에 대한 경외심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있는 것을 있게끔 하는 없는 것, 텅 빈 것, 빈탕 한데,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본래 그것인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신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경우 신은 더 이상 본래의 신이 아니다. 우리는 말에 진리를 담으려 노력하지만, 진리를 말속에 담았다고 주장한다면 이때의 진리는 더 이상 참진리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정신이 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말해진 것만 믿는다. 우리는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문제다. 이제 우리도 서양 사람들에게 배워 말을 하기 시작하지만 그 말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하기를 매우 주저한다. 말하는 것만 믿는 서양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들은 그 손가락만 쳐다본다. 손가락만 보는 그들에게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그리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설득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마당에서 그들의 놀이, 게임, 방법, 규칙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말로 진리를 전부 배울 수는 없지만 진리를 말로 표현하려고도 노력해야 하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1세기 인류는 기술과 과학이라는 최첨단 열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낭떠러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빨리 그 방향을 돌려놓지 않으면 인류는 물론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 다음 편에서는 ‘인간은 사이-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전집 제1권), 한길사, 1993, 94쪽 이하.
⑵ M. Heidegger, < Spiegel-Gespräch mit M. Heidegger>(하이데거의 슈피겔 대담) >,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 (대답. 하이데거와의 대담), Neske: Pfullingen, 1988. 99/100.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나는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즉 사유와 시작이 [사유자와 시인이 사유와 시작에서] 신이 나타날 수 있도록 또는 신의 부재가 거두어지도록 예비하는 데 있다.”
⑶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놀드 토인비, 루돌프 오토, 테야르 드 샤르댕, 앙리 베르그송, 칼 라너, 베른하르트 벨테, 하비 콕스, 달라이 라마, 숭산, 법정, 틱낫한, 현각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