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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년, 우리 삶의 목적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 이기상
  • 등록 2020-04-06 10:17:06
  • 수정 2020-04-06 10: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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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성히, 맘놓이, 뜻[바탈]태우, 얼돌이[얼들이]


하늘을 모으고 땅을 모은 것이 ‘ㅁ·ㅁ’인데 이 모인 상태가 밖으로 나타나는 데에 따라 그것은 ‘맘’이 되고 ‘몸’이 되고 ‘믐’이 된다. 태극점이 밖으로 나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 ‘맘’이다.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내가 모은 하늘과 땅을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각자가 모은 하늘과 땅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모은 몸(힘)과 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 현대에 들어서서는 몸으로 상대를 지배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즉 뜻, 의욕, 욕구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는 것이 더 무서운 폭력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석은 그러기에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말한다. 빔 사이에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라고 ‘몸성히’라고 말하며, 사람 사이에서 마음에 집착하여 욕망과 욕구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맘놓이’를 권한다. 맘놓이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 ⓒ 문미정


뜻나에서는 ‘뜻태우’, 즉 뜻을 태우라고 말한다. 뜻을 바탈이라고도 해서 ‘바탈태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우라는 것이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그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 


다석은 바탈태우를 얼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다. 글쓴이는 다석을 공부하면서 뜻과 얼이 때때로 뒤섞여 쓰이곤 하지만 많은 경우 둘을 나눌 때 더욱 풍부한 내용을 품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석 자신은 말하지 않는 얼나와 관련지어 많은 고민을 하였다.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그 다음 얼나의 차원에서 이루어야 할 일을 무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만든 개념이 ‘얼돌이’이다. 얼을 돌려 한얼의 정신을 우주 곳곳에 펴자는 뜻이다. 한얼을 내가 받아 돌려 한얼과 내가 일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얼인 한얼과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얼을 돌린다는 ‘얼돌이’나 얼 속에 들어간다는 뜻의 ‘얼들이’ 가운데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다석이 얘기하는 얼은 ‘한얼’이다. 한얼과 얼나의 일치가 다석이 생각하는 영성적인 차원이다. 우리말의 ‘한’은 ‘온통, 크다, 전체, 온전함’을 나타낼 때 쓰인다. 다석은 아래아(․, 태극점) 앞에 ‘한’ 자를 더해 모든 시작의 시작, 가장 큰 태초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한아]를 말한다. 여기서 숫자의 시작인 ‘하나’가 나온다. ‘하늘’은 ‘한’과 ‘늘’이 합해져 나왔다. 여기서 ‘한’은 무한한 절대 공간을 말하며 ‘늘’은 늘, 항상, 언제나 그런 것이다. 즉 무한시간, 절대시간을 말한다.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만난 곳이 ‘한늘’이고 그것이 ‘하늘’로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늘님, 하느님이 나왔다. 하느님 이름 안에도 우리의 생활방식, 삶의 문법이 배어 있다. 


얼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변화를 주재하는 힘이기에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는 우주의 얼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우주의 얼이 들어 있다. 우주의 얼을 통째로 보면 그것은 곧 생명력 그 자체로서 우주생명이며 한얼이다. 다석은, 이 많은 표현들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우주생명인 한얼과 교통하는 가운데 이름붙인 것들이라고 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한얼의 말건네옴에 대한 인간 쪽에서의 대답이고 그래서 그 이름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신을, 성스러움을 이름 속에 잡아넣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이 있는 인간으로서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가’가 있는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그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인간 쪽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 이름들은 자신들이 어떤 부름에 대한 대답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의 이러저러한 면모 가운데 하나를 찍어서 이름 속에 담고 있다. 그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하느님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 그 자체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많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절대자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한얼에 들어서 그 얼을 돌려 우선 내가 그 한얼과 하나되고 그 다음 우주의 모든 것들이 한얼과 하나되는 큰 해탈을 도와야 한다. 그 일을 함이 ‘얼들이’고 ‘얼돌이’이다. 얼나로서 한얼과 하나되어서 한얼 속에 들어 그 한얼을 돌려 우주를 살리는 우주의 생명력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몸살이와 먹음(알음알이)


▲ 영화 < 모던 타임즈 > 스틸컷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적인 사유다. 노장사상(도교), 불교, 유교, 기독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의 길을 터줄 수 있는가에 다석은 관심을 가졌다. 몸만을 아끼는 삶에는 한계가 있다. 전에는 맘의 차원까지도 강조가 되었는데 요즈음 보면, 친구 사이에도 네 것 내 것 없이 같이 어울려 서로 함께 먹고 놀던 풍토가 사라져버려 없다. 아이들은 기계(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기계와 함께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 사건들의 경우 많은 부분 아이들이 현실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계화된 마음과 현실에 인간의 양심과 마음씀이 들어설 수 없다. 인간이 몸에만 집착하여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기계에만 빠져든다면 산업적인 구두기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산업적인 구두기에 빠져 몸살이에 사는 사람들은 ‘먹다’라는 낱말을 가장 좋아한다. 사람들이 서로 마음써주는 교류 없이 몸이나 물질 또는 기계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대하다 보니 사용하는 낱말도 인간들 사이의 마음의 교류가 아닌 육체적 차원의 신진대사에서 따온 말들이 주를 이루면서 생겨나는 현상 때문이다. 사람 사이만이라도 사이좋게 사이 나눔을 해야 한다.


맘살이와 삶 앎


다석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뜻과 얼의 차원이다. 몸나의 차원에서 즐겨 쓰는 말이 ‘먹다’이지만 보편적인 표현은 ‘보다’이다. 맘 사이의 보편적인 표현은 ‘알다’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는 것이다. ‘알다’에서 ‘알음’이 나왔다. 모든 알음은 ‘알이’고 모든 ‘알이’는 ‘앓이’다.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몬 사이, 사람 사이, 몸살이, 맘살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알이는 그런 알음알이다. ‘알이’는 무엇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알게 되는 그런 알음이다. ‘알’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알음’이다. 이 알음에서 ‘아름다움’이 나왔다. 몸차원에서 알음이 알음다움[아름다움]이다. 


맘의 차원에서 알음이 보편적인 지식으로 확대되어 그것은 앎[지식]이 된다. 몸의 차원에서 생명의 활동이 단순히 육체적인 에너지를 사르는 ‘사름’으로서의 삶이라고 한다면, 맘의 차원에서는 그 삶을 알아 이 앎을 다시 삶에 되먹임하는 그러한 ‘삶을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앎이 지혜다. 사람은 그러한 삶의 지혜를 갖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앎의 관계를 우리는 착함(선함)이라 표현한다. 착함은 ‘작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작다’는 ‘싹’에서 나왔다. 새싹은 아주 작다. 이 작은 새싹이 착함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뜻살이와 깨침


뜻으로서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뜻을 읽어내는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뜻을 읽어내려 시도한 책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민족의 뜻을, 더 나아가 ― 다석이 강조하듯이 ― 하느님의 마루 뜻을 읽어내야 한다. 이 마루 뜻이 우리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뜻의 차원은 깨침이고 참 곧, 진(眞)이다. 진리로서의 참은 속이 꽉 차 있음을 말한다. 참은 채움이다. 채운 것은 자람이 있어야 한다. 작은 새싹이 돋아나 자라서 자신을 채워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땅에 떨어져 다른 생명을 위한 음식이 되어 자신을 나눠주고 자신을 비워 새로운 생명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속알→싹(솟다)→자라다→채우다→열매→나눔→비움의 우주적 연관관계에서 참다운 이치를 알아볼 수 있다. 인간은 거기서 자신의 본모습과 역할을 배워야 한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속알(우주의 생명력 또는 바탈)을 알아보고 그것을 자라게 하여 꽉 채워 열매로 맺어 내놓아야 한다.


얼살이와 깨달음


얼나의 차원에서는 비우는 것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추는 차원이 더 있다. 하늘과 땅 사이라는 생명의 차원에서 볼 때, 생명의 원칙은 비움과 나눔이다. 생명의 세계는, 하나의 씨앗이 그 껍질[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썩히고 비우고 나누어야 새싹이 돋아난다. 그리고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땅속으로 돌아간다. 생명 자체는 끊임없는 나눔과 비움이다. 서양사람들은 생명의 현상에서 비움과 나눔이 아닌,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살육경쟁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똑같은 생명현상에서 적자생존, 자연도태, 우승열패 등으로 설명되는 생존경쟁을 보았고 그것을 모델 삼아 무한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생명관과 세계관이 다르기에 그들이 본 진리와 우리가 본 진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얼의 차원은 깨닫는 것이다. 깨침과 깨달음은 다르다. ‘깨침’은 머리의 차원이다. ‘깨달음’은 머리로 깨친 것을 이제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혼자서만 그 진리를 품어서는 안 되고, 세상에 널리 알려 그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선포하여야 할 사명까지도 있다. 깨달음은 거룩함과 연관되어 있다. 다석은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하느님과 관련지어 말하면서 ‘없이 계심’이 거룩함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비움과 나눔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나누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태극 밖에는 무극이 있고 모든 사이를 가능케 하는 사이로 텅 빔이 있다. 


21세기의 영성적 인간


▲ Marc Chagall < The Creation of Man >


우주진화의 꽃인 인간 안에는 지난 140억 년의 우주적 영성이 무의식적인 앎의 형태로 녹아 있다. 우주적 진화 속에서 인류의 발달도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은 인류 진화의 역사가 그 흔적을 개개인의 몸 속에 남기며 그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어두운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종족발생적 차원의 경험들이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개체의 삶의 과정 속에 개체발생적으로 반복되며 서서히 새로운 경험의 요소와 차원을 넓혀가고 종족발생적으로 새것들을 유전자 속에 각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종족발생적인 차원에서의 인류의 현 시대적인 시점은 개인의 발달사에서 어느 시점을 나타내고 있을까 한 번 생각해봄직하다. 주체의 시대인 근대가 그 극에 이르고 이제 주체의 죽음과 해체라는 탈근대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대를 되돌아볼 때 자기의 뜻과 주장이 확고하여 마음먹은 바를 꼭 관철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불혹의 나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들의 인생관에서 50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적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루어 놓고 시간이 남아돌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이는 아닐까? 그 남아도는 시간을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에, 스포츠에, 소비에,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 찾기에 쏟아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가(자유)시간을 여행에, 다양한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에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가능한 모든 것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새로운 형태의 초월을 체험하고 신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세속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이 모든 것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허탈감 속에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재적인 경험이 장래의 어느 시점에 종족발생적으로 인류의 무의식을 각인하여 미래의 모습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탐욕, 다툼, 경쟁, 지배, 소유, 소비, 소모, 방탕, 후안무치 속에 50대에서 삶을 끝낼 것이라면 지금 이대로 기계화된 마음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도 아마 21세기를 온전하게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천년은 아마도 인간 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인간이 우주진화의 꽃이자 구슬로서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이 그토록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갈구하며 고대했는가 보다. 


21세기는 새로운 영성, 정신성, 종교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자세히 고찰해 볼 때, 그것은 개인 발달적인 삶의 전개하고도 통하는 점이 있다. 우리는 50대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 자신의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우주의 숨은 명을 알아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육체에 묻히거나 가족이나 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거나, 돈이나 이념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고, 나 중심, 민족 중심, 종파 중심, 인간 중심에 빠지지 않고, 욕망을 비우고 맘을 자유롭게 놓아 우주의 얼과 하나 되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럴 때 인류가 고대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들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가치들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나이 50은 이렇게 영적인 나인 <얼나>로 깨어나 내 안에 있는 속알[性, 天命]을 깨우쳐 알아 그 바탈을 태우게 되는 나이이다. 나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력제를 찾아다니는 나이, 가족과 가문에 매여 문벌․학벌․재벌의 울타리에 갇혀 명예와 권위에 안주하며 만족해하는 나이, 민족과 국가, 문화와 이념의 일면성에 눈이 멀어 자기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정당화 속에서 언어의 놀이에 도취되는 나이여서는 안 된다. 침묵 속에서 내 안에서 말 걸어오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해 우주적 대해탈의 역사에 동참하려는 원대한 꿈을 키워야 할 나이이다. 인류의 나이는 기술문명의 편함에 모든 것이 퇴화되어 버린 무기력한 나이에 고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영적인 <얼나>의 단계로 솟나야 한다. 그럴 경우 우주의 진화는 그 방향을 달리하게 될 것이며, 이 우주는 인간을 털어내서 인간 없이 그 생성과정을 계속하려 하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천년들을 맞이하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다석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습니까? 똥벌레 같은 인류가 생각[념(念)]으로 사상을 지어내는 점이 동물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나마 고마워해야겠지만 그 사상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 우리의 사상은 누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은 신념을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에겐 반드시 관념(觀念)이 있어야 합니다. 몸은 비록 30대까지만 자라지만, 마음은 80, 90세까지 계속 자랍니다. 영원한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관념보다 강한 신념(信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에는 정의나 진리의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신념 시대입니다.”



▶ 다음 편에서는 ‘세상을 보는 눈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김흥호 선생은 이렇게 풀이한다. “인간은 우주의 비밀을 열어보고 있다. 열면 봄이 되고 닫으면 몸이 된다. 열면 마음이 되고 닫으면 이 된다. 인생은 풀어 열기도 하고 닫아 매기도 한다. 이것을 열매라고 한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도 싹의 몸과 꽃의 봄과 열매의 가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열매는 과일이 열리고 맺히는 뜻도 있고 우주가 열리고 닫히는 뜻도 있다. 몸은 봄을 거쳐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도요, 우주의 섭리요, 인생의 길이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솔, 2001, 62.


 “나는 이어 이어 예 한 점이 내가 아닐까. 이 한 점에 힘이 붙고 능력이 붙고 수가 생겨 몸성히 마음놓이 이것이 내가 아닐까. 마음이 놓일 때 마음은 비어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고 몸성히 불이 될 때 몸은 살아 임을 그리워하게 된다. 목숨 쉼은 불사름이요, 말씀 쉬면 물 씻음이니 깨끗하게 비고 아름답게 태워서 새로운 바탈을 내놓음이 숨쉬는 한 목숨이요, 영원히 이어나갈 이 목숨이기에 맘 비고 몸성히 숨쉬는 한 목숨이다. 나의 바탈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것인데 몬으로 지어 먼지가 되면 흙덩이처럼 가득 차 새로운 바탈을 내지 못하고 힘도 없고 수도 없어 숨도 못 쉬는 흙덩이가 되고 만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7.


 “먹는 것은 배로 먹고 자는 것은 가슴으로 자고 집 짓는 것은 머리로 짓고 나르는 것은 손발로 날라 몸으로 먹고 마음으로 자고 정신으로 세우고 영혼으로 날아간다. 의 통일과 마음의 평등과 정신의 독립과 영혼의 자유는 막을 도리가 없다. 개인으로 먹고 집으로 자라고 국가로 세우고 세계로 날아가도 좋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9.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적 심리발달의 가장 아래 단계로 구두기와 항문기를 꼽는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입 속에 넣어서 입으로 확인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성적 쾌감의 부위가 입에 있다고 해서 구두기라고 표현한다. 그러다가 자라면서 이 쾌감의 부위가 입에서 항문으로 간다고 본다. 배설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배설물을 뭉개면서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에는 성기를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로 넘어간다고 풀이한다. 따라서 산업적 구두기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인간이 가장 어렸던 유아단계로 퇴행해감을 뜻한다.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795.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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