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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회는 예수가 꿈꾸는 사회다 - [기본소득과 신학] 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②
  • 홍인식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6-05 14:49:24
  • 수정 2020-06-05 15: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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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에 연재된  ‘기본소득과 신학’ 가운데 일부입니다. - 편집자 주


신자유주의의 종교적 신조들



1920년대 월터 벤쟈민(Walter Benjamin)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Capitalism as Religion, 1921)라는 저서를 발간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본주의를 막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특정한 종교에 의해 형성된 이념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종교개혁은 자본주의의 발생을 지원한 것을 넘어서서 종교자체가 자본주의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벤쟈민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존재했던 제의적 종교에서 가장 공리주의적 종교이다. 자본주의의 제의는 영구적이며 그것은 주중의 어떤 특정한 날에만 이루어지는 제의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제의적 종교 안에서 가장 숭배되는 것은 ‘성공’과 ‘소비능력’이다. 이 같은 벤쟈민의 지적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더욱이 제의적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통하여 그 종교성을 강화시켜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요약해 보자.


1. 신자유주의는 그의 비인간적이며 경직된 유일신 종교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의 속성으로 알려져 있는 전지, 전능, 무소부재와 섭리의 개념이 시장에게 적용되면서 시장은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는 질투의 유일신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시장 밖에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3분지 2 이상의 인류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구원일 뿐이다.


2. 종교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소수의 구원을 위하여 다수의 필연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과정적인 희생이며 결국에는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수에게 제공되는 구원은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와 더불어서 양극화 현상을 발생하게 만든다.


3.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악마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그것의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신성 모독적 행위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노동조합의 행위도 성스러운 신의 질서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도발행위로 간주된다.


4. 종교로서 신자유주의가 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지원하고 함께 하기 위해서 공권력은 합리적인 세제 운영, 상품거래의 완전 자유화, 노동과 고용 시장의 유연화, 경제의 민영화를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5.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들을 통하여 투자자와 주식 시장의 소비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지침들을 제공한다. Wall Street Journal, The Financial Times, The Economist 등과 같은 경전들(bibles) 사용하여 신자유주의의 ‘행복의 복음’을 전파한다.


6. 새로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성사(聖事, sacraments)는 소비자들에게 매순간 신선하게 제공되는 상품들이다. 각종 광고를 통하여 소비자들의 소비욕망을 부추기며 새롭고 신비로운 소비의 세계로 그들을 안내한다. 성사(聖事)로서 상품은 거룩한 제단과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성사에 참여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사(聖事)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것은 소비능력을 갖추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신의 은혜일뿐이다.


7. 새로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성전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다. 신자유주의의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은행에 대한 존경과 경배를 아끼지 않는다. 모든 종교의 경우처럼 신자유주의 성전에서도 희생제사가 이루어진다. 희생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자연의 생명들이다. 이들은 생산성 향상과 부의 축적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아낌없이 희생된다. 낙원의 성취를 위하여 필연적 희생은 기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8.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철저한 개인영역의 개체화와 신성화를 추구한다. 신자유주의는 인류의 공동체적인 차원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매순간 원자화(atomized)하여 의미 없는 단지 귀여운(cute) 존재로 만드는 제도화된(institutionalized)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신자유주의 안에는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은 사라진다.


9.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근본적이고 교리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주의는 종교의 근본주의와 유사하다. 자신들의 주장을 강제하며 다른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근본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경직성을 나타낸다. 경직성은 경제이론의 상황 적용에 있어서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변화되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이론이 아니라 상황 자체이다.”라는 말에 종교적 근본주의와 경직성이 드러난다.


10.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복음은 경쟁력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모든 영역 즉 초중고등 학교, 대학, 전문인 양성과 교육, 과학연구, 발전 등 모든 것은 경쟁력에 의해 좌우된다. 교육의 목표는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는 온전한 인간의 형성이 아니다. 경쟁력 있는 인간의 생산이다. 경쟁력은 시장의 종교가 외치는 유일한 복음이다. 이 복음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의 복음 없이 경제적 성장, 사회복지와 정치적 독립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과 경제


인간의 가치관과 기독교적 가치관의 악마적인 도치현상과 인간의 제도를 신성화하며 그의 이름으로 부의 무제한적 축재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시장체제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그 ‘제국’에 대항하는 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에 어떠한 원리적 근거가 있었다고 한다면, 신성화된 체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미 Marx가 지적했던 것처럼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에 대한 전제조건이다.’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신성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만 비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의 ‘성스러운 종교적 서광’을 거두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종교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로소 그 체제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우리의 사회 속에서 배가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신학이 자본주의의 이론과 활용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특히 윤리적-영성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 기독교는 윤리-영성적 차원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간주하는 제의적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도전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며 대안적 삶에 대하여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발되는 윤리-영성적 행위와 대안적 삶에 대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 해방의 윤리적 영성


해방신학은 물론 기독교 윤리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로부터 출발되어진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그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삶을 살아왔다.


여기서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단순한 비유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논리와 동력이다. 해방의 윤리적 영성에서 양심은 단순한 특정 상황에 대한 도덕적 원리의 적용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표정에 대한 응시와 아픔을 함께 하는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2. 정의와 평화의 윤리적 영성


불의와 부정은 어느덧 우리 인류의 삶에서 일상적인 현상이 된 것 같다. 불의는 조직화 되어 있고 더욱이 메델린에서 개최되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문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이러한 폭력과 불의에 영원히 매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있다. 인간은 정의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향한 열망은 성서와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영성과 일치한다. 정의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마태 6;33)


Rene Padilla는 사회의 모순을 단순히 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문제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는 오히려 사회정의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의 현실과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경제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정부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실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현 경제시스템의 악마적인 성격을 고발하는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청지기적인 책임을 회피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을 통하여 다른 사회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조라는 것”(John H. Yoder)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폭력은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와 분리되어 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성서적 혹은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약적 전망으로부터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함과 그리고 그러한 삶이 필연적으로 평화의 실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조화, 평안함, 번영 그리고 생의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뿐만 아니라 평화는 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분리되어 질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이며,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 아니겠는가.(이사야 32:17)


3. 은혜의 윤리적 영성


우리 사회는 점차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이다. 모든 것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진다. 가장 짧은 시일 안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채는 1원까지도 남김없이 갚아야 한다. 여유와 쉼은 그 자리를 잃어가고 오직 경제발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은 희생되어지고 유보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과 이 전통을 이어가는 나사렛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안적 윤리적 영성! 그것은 은혜의 윤리적 영성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상업적 관계가 아닌 사회의 유토피아적 꿈을 외친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이사야 55:1~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모습을 돌아볼 것을 말하면서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베풀 것을 요구한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은혜의 윤리적 영성, 대가를 치르는 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말해야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회, 그것은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가 꿈꾸는 사회이다.


4. 동정과 자비의 윤리적 영성(고난의 동참과 나눔의 영성)


세계화는 인류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제안하였지만 우리는 곧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세계화는 인류의 빈부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계화 과정 내부에 태생적으로 자비의 영성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자비의 부재는 세계화 과정 자체가 ‘나와 다른 인간’, 동물, 그리고 자연세계의 필연적인 희생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 지탱되어 진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를 행하여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세계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동정적인 행동, 다시 말하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동참과 나눔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그리고 인간론적 원리인 자비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해방신학의 자비와 동정의 영성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는 희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당시의 유대교를 비판하면서(이사야 1:10~15) 믿음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정의의 추구, 억압받는 자의 인권 보호, 고아와 과부에 대한 돌봄을 제안하고 있다.(이사야 1:17) 더 나아가서 호세아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6)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에게서도 이러한 동정과 자비의 영성은 손쉽게 발견되어진다.(마태 9:13, 12:7)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동정과 자비의 영성을 강조한다.(누가 10:29~37) 그리고 말한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5. 이웃의 윤리적 영성


보프는 그의 최근의 저서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위한 덕목 II』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대치하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한 덕목으로 친절함(베풂), 더불어 삶(상생), 존중 그리고 관용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존중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서 “이웃”을 강조한다. 이웃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없이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은 세상”은 이웃에 대한 인정, 각 인간 존재의 내재된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정과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으로부터 출발되어진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웃을 배제한다. 이웃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문화를 지향한다. 나 자신만의 행복과 세계에 전념하며 모든 것은 “나의 세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수동적이고 무표정한(무감각한) 인간성이 형성되어진다. 신자유주의적인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현 세계의 개혁(변화)을 도모하려 하지 않으며 “나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할뿐이다. 그에게 가장 중심적인 삶의 주제는 “나의 세계”일 뿐이다. “나의 세계”의 강조는 현 사회에서 반문화운동의 사라짐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homo politicus의 종말과 더불어 homo psicologicus와 homo oeconomicus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윤리적 영성의 목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가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가져야 할 모습은 보프가 지적하는 “이웃의 윤리적 영성”이다. 이웃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 ‘섞어짐’(mestizage)의 실천, 받아들임, 인종간의 교제와 소통, 문화 간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잊혀 있던 억눌린 이웃, 소외 받고 있는 이웃, 침묵을 강요당한 이웃, 모욕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 것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음으로써 “이웃”을 발견하는 영성을 지향하고 있다.


홍인식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


▶ 지난 편 보기


⑴ 교로서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종교-경제적 신조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폐해인 양극화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부가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이유에 대한 연구는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생각과 이념들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⑵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결과로서의 양극화 현상의 심화에 대해서는 한스 피터 마르틴, 하랑드 슈만 공저. 세계화의 덫, 강수돌 옮김, 영림카디널, 1998.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05. Franz J. Hinkelammert, El mapa del Emperador(제국의 지도), DEI, 1996.를 참조하라. 


⑶ 1989년 와싱톤 합의에 의한 사항들이다.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는 미국과 국제금융자 이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도록 하자고 한 합의를 말한다. 냉전시대 붕괴 이후 미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는 '위기에 처한 국가' 또는 '체제 이행 중인 국가'에 대해 미국식 시장경제를 이식시키자는 모종의 합의가 이뤄졌다. 미국의 정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1989년 자신의 글에서 이를 'Washington consensus'라고 불렀다. 이 합의에서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사유재산권 보호, 정부규제 축소,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개방, 경쟁력 있는 환율제도의 채용, 자본시장 자유화, 관세 인하와 과세 영역 확대, 정부예산 삭감, 경제 효율화 등이다. 


⑷ Jose Tamayo, Fundamentalismo y dialogo entre religiones,(근본주의와 종교간 대화) Trotta, Madrid. 2004 는 종교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근본주의를 잘 비교하고 있다. 


⑸ Joseph Stiglitz, El malestar en la globalizacion(세계화의 폐해), Taurus, Madrid, 2002. 


⑹ Ricardo Petrella, "El evangelio de competitividad"(경쟁의 복음): Le Monde Diplomatique, 2004년 1월. Petrella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십계명을 소개하고 있다. 1. 어느 누구도 자본, 시장, 금융과 기업의 세계화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를 방해하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2. 기술의 계발과 발전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원가와 노동임금의 절약을 통한 최대이익 창출을 위하여 노력해야한다. 3. 공공의 간섭과 보호정책을 배제하면서 시장의 완벽한 자유화를 추구하라. 4.모든 권력은 시장으로 이양하라. 정치권력은 잔지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하라. 5. 모든 영역에서 공공재산을 재거하고 사회의 통치권을 민간 기업에게 이양하라. 6. 치열한 경쟁세계 안에서 생존하기를 원한다면 강한 존재가 되라. 7.사회정의 옹호를 포기하라. 그것은 쓸모없는 미신이다. 이상주의 혹은 종교적 행위 또한 비생산적인 행위들이다. 8. 공동체 혹은 사회적 차원을 배제한 채 절대적 가치로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라. 9. 모든 행위에서 정치적 윤리적 차원보다 경제적 차원의 우선순위를 옹호하라. 10. 모든 영역에서 시장 종교의 모든 제의와 성사와 거룩한 독서, 성전과 성직자들을 존중하고 경배하라. 


⑺ 사 1;17, 누가 4:16~21, 7:18~32, 마태 25:31~46


⑻ Leonardo Boff, Virtudes para otro mundo posible I (다른 세상의 가능을 위한 덕목들 I), Sal Terrae, 2005, 138쪽 


⑼ Rene Padilla, Discipulado y Mision(제자도와 선교), Karios: Buenos Aires, 1997, 56~57쪽 


⑽ Leonardo Boff, 언급된 책 II, 43쪽~66쪽


⑾ Lipovetsky가 지적하는 것처럼 ‘집단적 나르시즘’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⑿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보여 지듯이 잊혀지고 거부당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존중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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