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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과 경제, 예수로부터 나온 ‘대안적 삶’ - [기본소득과 신학] 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③
  • 홍인식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6-10 10:55:10
  • 수정 2020-06-10 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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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에 연재된  ‘기본소득과 신학’ 가운데 일부입니다. - 편집자 주



6. 연대와 공동체의 윤리적 영성(포함의 영성)


욕망의 시대에서 보다 더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의 벌어짐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 현상은 점차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인 차이에 근거한 사회적 계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의 시대는 “신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형성된 새로운 부족(사회계급)들은 각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다. 교육, 문화, 예술, 취미생활 심지어는 식생활에서도 급격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부족 간의 관계는 단절되어진다. 새로운 부족시대의 등장이다.


유대교의 이방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의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1~12)라고 외치면서 부족을 넘어서는 서로 다름이 어울려 살아가는 연대와 공동체의 사회를 가르쳤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계급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구체화한다. 기초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의 역사적 위력을 강화시켜 왔다. 연대만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도록 해 줄 것이다. 해방신학은 결코 혼자만의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성을 포기한다. 해방신학은 연대 속에서 함께 이루고 함께 가는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도 그의 영성이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포함의 영성”(inclusive spirituality)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듯이 해방신학의 영성도 그러하다.


7. 생명의 윤리적 영성


생명은 하나님의 은사 중 가장 값진 은사 중의 은사이다. 우리가 보존해야 할 가장 최우선의 가치는 생명이다. 생명은 모든 윤리적 권리의 기초와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모든 윤리적 행위의 출발점이며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생명은 최대이익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희생당할 수 있는 요소이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생명, 소비사회에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생명은 고귀하게 취급받지 못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발전과 최대이익의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자본과 시장의 제단 위에 바쳐질 수 있는 필연적인 희생제물이다. 이러한 생명 경시와 도구화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양극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하나님 존재 자체에서도 그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음의 우상들을 대항하여 생명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마태 12:27) 생명존중의 문화는 기독교가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이 세계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외침이다.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생명을 함부로 그리고 손쉽게 파괴하는 이 세계를 향한 가장 강력한 항거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 우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인간 생명의 구원은 안식일 실현에 앞서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인간 생명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 세계에 풍요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한다. 그의 부활 역시 죽음에 항거한 생명의 승리와 죽음의 피해자들의 회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윤리적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보호하라. 삶을 살라 그리고 살 수 있도록 협력하라.”를 외치게 하고 있다.


8. 억압적 권력의 윤리의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약함의 윤리적 영성 (독재적 권력을 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유혹은 없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을 향하여 손짓하는 유혹들 가운데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유혹도 드물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분야에 있어서도, 권력(그 권력이 자신의 직분에서 올 수도 있고 또한 어떠한 영적인 카리스마에서 오는 권력일 수도 있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 질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성서구절과 신학적 뒷받침을 동반하는 ‘경건’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권력,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악마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시도를 계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권력 남용에 대하여 예수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부패한 권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예수는 독점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의 대안으로서 섬김과 약함의 신학을 소개한다. 예수는 승리적인 메시아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윗의 전통에 의한 메시야 칭호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메시야 됨’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출애굽, 예언자, 지혜서 그리고 시편의 영성적 전통 등과 같은 종교적 전통의 선상에 두고 있다.


9. 충돌과 예언적 비판의 영성 (경제적 종교 비판, conflictive spirituality)


충돌과 갈등은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가 살던 당시의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였으며 또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의 요소를 다분히 소지하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갈등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예수의 갈등유발 혹은 충돌은 여러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는 민중의 자유를 위한 정치권력을 향한 도전과 충돌, 정의를 위한 경제 권력과의 충돌, 인간과 믿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한 종교권력 및 공식신학과의 대결,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하여 가부장적 사회와 충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포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한다.


이렇듯 예수는 수많은 질문과 충돌, 그리고 갈등을 유발시키면서 당시의 사회에 도전하였다. 예수의 해방적 영성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욕망의 사회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결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시급하게 회복 되어야 할 목회적 기획과 시도는 이 같은 충돌, 예언자적 비판과 갈등유발의 영성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10.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의 윤리적 영성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과 돈(맘몬)의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은 매우 과격하게(radical)하게 주장되어 왔고 이에 대한 어떠한 예외도 용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원리로만 주창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실천되어졌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필요 이상의 어떠한 물건의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거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비-양립성은 후대 교회에 의하여 왜곡되어졌고 “만족의 문화”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 대한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신앙의 선배들의 실천적 삶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빈혈증을 앓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에 관련한 교회의 풍요로운 가르침과 경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과 부가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물질적인 번영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의 명백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대가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번영의 신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오신 ‘예수의 복음’의 가르침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돈-신의 개념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절대적으로 물질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가 물질적인 목적의 실현을 향한 개인의 욕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someone)’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something)’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웃의 존재는 쉽게 무시되거나 소홀해 진다.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오늘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 시키는 것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물질소유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시급하다. 우리는 오늘 인간 존재의 경제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시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의 삶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포함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들과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서부터 출발되어 질 것이다.


11. 친절과 품음의 윤리적 영성


친절은 인간존재의 인간화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Leonardo Boff는 “Otro mundo posible”(가능한 다른 세상)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무엇이 세계화 현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갖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4가지 덕목을 열거하면서 이 덕목에 기반을 둔 윤리적 영성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관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이 되지 못하며 또한 그 어떤 세계화도 인류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를 자연스러운 의무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치관은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창 18:1~6, 19:1~11, 사사기 19:1~30) 나그네 환대의 거부는 하나님의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는 신약의 복음 전통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로 나타난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는 환대는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종말론적 비유에서 나그네 환대는 인간의 구원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으로 등장한다.(마태 25:31~46) 나그네와 작은 자들에 대한 거부는 예수 자신에 대한 거부로 간주된다.


Boff는 친절함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그 기초로서 “다른 사람들”(Others)의 “되찾음”을 언급한다. 경쟁을 복음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의 욕망의 시대에서 “다른 사람들”은 설 자리를 갖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린 욕망의 시대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모델은 “다른 사람들”을 회복하는 친절함고 받아들임의 영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질 것이다.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친절과 받아들임의 영성을 위한 Boff의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여기에 인용해 본다. 


“세계화의 현장에서 친절함과 받아들임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많은 장애에 접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현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무조건적인 실천 의지 배양하기 2. 풍요로움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3. 다른 사람의 소리에 신중하게 귀 기울이기 4. 솔직하게 대화하기 5. 정직하게 거래하기 6. 공동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관심을 포기하기 7. 의식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하기 8.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의 상대성을 인정하기 9. 지혜롭게 상황의 변화를 도모하기”


홍인식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Viktor Frankl, El hombre en busca de sentido(의미를 찾는 인간), Barcelona, Herder, 1986. 8 쪽. 그가 말하는 부족성의 출현은 신자유주의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임을 밝혀둔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 강남에서도 동네에 따라서 삶의 문화와 형태가 달라짐을 목격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강남과 강북 학생들의 학력 차이는 이러한 새로운 부족 사회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이름으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 시킨다.


신자유주의의 권력지향성은 권력의 남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마가 10:42) 


헤롯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율법이 금지한 일을 함으로서 체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 10:43~45)


Juan Jose Tamayo, Etica liberadora del cristianismo frente a teologia neoliberal del mercado,(시장의 신자유주의적 신학과 기독교의 해방적 윤리) 미간행 논문, Madrid, 2008, 27쪽


이에 대하여 Juan Jose Tamayo는 예수에 대하여 인내와 순종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왔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명백한 해석학적 오류하고 주장한다. (Juan Jose Tamayo, Jesus y los conflictos, Bases para una etica teologica de los conflictos(예수와 갈등, 갈등의 신학적 윤리를 위한 기초): Frontera 14(abril-junio, 2000) 23~44쪽 


안식일 병자 치유 사건 등은 예수의 의도적 갈등유발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눅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Justo Gonzalez는 자신의 저서 Faith and Wealth (Harper & Row, 1990)에서 초기 4 세기동안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같은 물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제로 적용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Leonardo Boff, 언급한 책 I, 11쪽. 


Leonardo Boff, 언급한 책 I, 135쪽~14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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