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성(性), 몸의 언어에 대한 예의’입니다. - 편집자 주
“제 말을 믿어줄까요?”,
“응? 왜? 왜 니 말을 안 믿어줄 것 같아?”,
“음.. 누가 ○○(가족 구성원)이 어린 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이나 하겠어요?”
“아닌데, 변호사님은 많이 봤는데. 수영(가명)이 같은 친구들 많이 있어. 많이 만났어”
‘많이 봤다’는 내 얘기에 처음으로 수영이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춰주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센터에서 요청이 왔다. 중학생인데, 초등학교 때 가족으로부터 꽤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했다. 가해자로부터 분리되어 피해는 멈췄지만, 그 후 자살 시도를 몇 차례 했고, 학교 상담도중 상담교사가 알게 되어 신고한 사안인데, 피해자나 피해자의 보호자는 사건을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가족들은 각기 다른 사정들이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하거나 사건 진행을 원치 않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건 피해자의 뜻이고, 피해자의 의사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수영이와 처음 만났을 때, 수영이는 전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고 작은 목소리로 엄마와 생각이 같다고만 말했다. 내 몸을 도려내고 싶다. 가해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분노도 크고, 과거의 피해가 여전히 수영이의 일상을 가로막고 현재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다른 가족들의 염려와 걱정이 수영이를 주저하게도 했겠지만 수영이는 무엇보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컸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증거도 없는데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왜 나한테만 이러한 불행이 왔을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 세상에 나같이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피해자들을 만나오면서 다른 범죄들보다 유독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들이 일상생활과 마음이 힘겹고, 회복과 치유가 더디다고 느끼게 된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한 경험을 외부에 말할 수 없는데서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 자신의 목소리가 온전히 수용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 나는 왜 그 일을 막지 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이 크다. 이러한 감정들은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호소할 의지를 꺾어버리고 피해자를 더 지치고 힘겹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수영이의 마음을 움직인 건 다름 아닌 ‘너 같은 친구들이 또 있었어. 아니 사실은 많이 있어’라는 말이었다. 사실 그 말이 그렇게 힘이 있는 말일 것이라고는 그 당시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무언가 의도하고 했던 말도 아니었다. ‘ME TOO’의 위대함은 피해자가 더 이상 그 일을 자신만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잘못으로 탓하지 않고, 용기를 내 한 발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걸 그 때 절실히 깨달았다. 수영이는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말했고, 길고 긴 수사와 재판 끝에 가해자는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성폭력 피해는 끊임없이 발생해왔다. 과거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친족 성폭력, 직장 내 성폭력, 학교 내 성폭력, 데이트 성폭력, 최근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피해 대상, 공간, 내용, 방법만 다양해졌을 뿐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과 착취, 괴롭힘은 계속 있어왔다. 어쩜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지 않는 걸까? 왜 가해자는 버젓이 따로 있는데, 되려 피해자 스스로 본인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고 있는 걸까? 그동안 우리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왔고, 어떠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봐왔었는지 돌이켜본다면 ‘제 말을 믿어줄까요?’라는 수영이의 첫 질문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많은 피해자들이 사건이 잘 해결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고 자조 섞인 말들을 한다.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관이 나를 나쁘게 보지 않기를, 처분을 하는 검사가 내 피해에 조금이라도 공감해 주기를,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가해자의 말만 그대로 믿지 않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고, 성인지 감수성이 조금 더 있는 경찰관, 검사, 판사를 제발 만나기를 빌 뿐이라는 것이다. 가해자를 벌주기 위해서 피해자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 끊임없이 말하고 답변해야 한다. 왜 그 때 가해자의 집에 함께 들어갔는지, 왜 가해자와 단 둘이 밤늦도록 술을 마셨는지, 왜 가해자의 스킨십을 바로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는지, 왜 가해자의 시도를 더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는지,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는지, 왜 피해 이후에도 계속 가해자를 만났는지, 왜, 왜..
형사 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피고인은 무죄가 추정되기 때문에 엄격하게 증명되어야 한다. 너무도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성폭력 범죄는 그 특성상 은밀히 벌어지기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 외에 목격자가 존재하기 어렵고 CCTV와 같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때 피해자의 진술은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증명하는 강력한 직접 증거가 된다. 피해자의 말이 유죄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엄정하게 조사되어야 하겠지만 피해자의 말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동안 자주 여러모로 의심을 받아왔고, 꽃뱀, 무고라는 단어는 늘 성폭력과 연관 지어졌다. 언뜻 보면 그러한 의심은 형사재판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굉장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 대검찰청과 함께 진행하여 낸 통계 분석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 고소 사건의 기소율은 매우 낮고, 무고로 유죄 판결이 선고되는 사례도 극히 소수라고 하니⑴ 객관적으로 밝혀진 바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폭력 범죄에서는 피해자를 향한 의심, 비난, 비아냥이 강했고, 이러한 문화는 그 동안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하기를 주저하고, 포기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상대방이 있는 말하기란 결국 상호 의존적이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내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내가 무엇을 말할지 또는 말하지 않을지, 어떻게 말할지를 좌우한다. 질문자와 답변자의 상호 작용과 의사소통의 과정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고, 이야기에서 얻는 정보의 양과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하고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실체적 진실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선 피해자의 목소리에 편견 없이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는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왔을까? 또 우리는 그들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줬을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 일이 나머지 네 삶을 결정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2년 전 수영이는 대학생이 되었다며 4년 만에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직도 심리치료를 다니고, 약을 먹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괴롭다고 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자신을 마주할 힘이 생겼다고, 즐거울 때 즐겁고 슬플 때는 슬프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조금 더 살아보겠노라고.. 수영이가 계속해서 살아갈 힘이 생기기를 기도한다. 앞으로도 마음껏 슬플 때는 슬퍼하고, 기쁠 때는 기뻐하기를...
정혜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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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윤덕경·김정혜·천재영·김영미,여성폭력 검찰통계 분석(II): 디지털 성폭력범죄, 성폭력무고죄를 중심으로,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