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성(性), 몸의 언어에 대한 예의’입니다. - 편집자 주
나는 몇 년 전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 시달려 이혼을 고민하는 한 중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그녀가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을 알고도 결혼을 감행하게 된 이유는 연애 시절 남편이 그녀의 나체 사진을 몰래 촬영해두었다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사진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유포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헤어진 남자 친구가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냐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그들은 이미 동영상이 유포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고, 사람들이 동영상 속 자신을 알아볼 것만 같아 집밖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카메라는 여성의 몸이 상품으로 간주되고 ‘순결’ 여부가 여성의 가치를 좌우하는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촬영되어 어딘가에 전시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n번방 사건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들에 대한 기존 범죄가 기술의 힘을 입어 가장 잔혹하고 악질적인 수법의 신종 범죄로 변이된 사건이다.
지난 몇 년 간 IT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달한 반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저열했고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 사이 웹하드사와 불법 포르노 사이트는 남성 프로슈머(prosumer)를 끌어들여 여성의 몸을 돈벌이로 삼는 사이버 성폭력 산업을 구축했다. 폭력과 협박, 유포로 성착취물을 생산해내고 그것을 ‘국산 야동’이라며 소비하는 가해자들은 사이버 상에서 집단을 이루어 존재했기 때문에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들은 여자 친구, 아내, 지인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게시하면서 ‘남성다움’을 인정받았고 더 많은 가해를 한 사람일수록 ‘형님’으로 대우받았다. 이렇듯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관찰하고 능욕하려는 남성사회의 관음증적 욕망은 n번방에서 피해자들을 ‘노예’로 지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n번방 관전자들에게는 영상 속 인물이 실제 피해자라는 사실이 아무런 도덕적 호소력을 갖지 못했고 범죄는 단지 ‘성적 취향’으로 여겨졌다.
n번방 사건에 온 국민이 경악하며 분노했던 이유는 n번방 가해자들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고, 그 피해자들이 우리의 10대 자녀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코패스 가해자’와 ‘성적으로 문란한 피해자’라는 도식이 깨지자 사람들은 혼돈스러워졌고 불안해졌다. n번방 사건은 디지털 성범죄가 여성에 대한 폭력, 성 상품화, 야동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누구나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공공의 의식 속에 불러일으켰다. n번방 가해자들을 엄하게 처벌하라는 여론도 거세지면서 여성들의 숙원이었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법 개정이 이루어져 소위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n번방 사건이 세간의 화제가 되자 교회 내의 디지털 성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교회 역시 디지털 성범죄와 무관한 곳이 아니다. 여러 명의 여신도와 성관계를 맺고 그 영상을 촬영하여 소지하고 있는 목사, 여신도를 상대로 성착취물에 나오는 가학 행위를 재연하는 목사, 예배 후에 의례적으로 성착취물을 시청하는 목사, 성착취물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자신의 PC에 저장해놓은 목사, 자신의 나체 사진과 성희롱 메시지를 여신도에게 전송하고 만남을 요구하는 장로 등, 대체로 교회 지도자들의 디지털 성범죄는 강간, 강제추행, 성희롱, 스토킹과 같은 실제 성폭력과 함께 나타났다. 가해자들은 이미 사이버 상에서 성적 환상을 키웠고 성폭력을 실행에 옮기도록 동력을 제공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성범죄와 교회 성폭력은 비슷한 점이 많다. 그 첫 번째로는 약자를 타겟으로 삼는 그루밍 수법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손에 쥐고 그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줄 것처럼 접근한다. 일단 피해자가 마음의 문을 열고나면 가해자는 성적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피해자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성적 요구에 응하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가해자는 협박과 폭력으로 피해자를 조종하고 착취한다. 그루밍 성범죄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인간의 자아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배신과 착취로 물든 관계를 내사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의 자아는 왜곡되고 파괴된다.
두 번째로는 가해자들의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다. 문형욱과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가해자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절대 잡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아무리 피해자들이 죽어가도 디지털 성범죄를 제대로 처벌하는 기준이 없어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것을 알았던 가해자들은 대담하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교회 성폭력 가해자들 역시 교회가 자신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보호해준다는 것을 습득하고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해왔다.
세 번째로는 낮은 피해 신고율이다. 피해자들은 “신고하면 유포하겠다.”는 가해자의 협박 때문에 제대로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동영상이 유포되었을 경우, 그들은 자신의 동영상을 경찰서에서 확인하는 것이 두렵고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도움도 요청하지 못한 채 사비를 털어 영상을 삭제하곤 했지만 영상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했다. 교회 성폭력의 경우, 문제제기를 하는 피해자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교회에 잠입한 이단 또는 목사를 음해하는 세력으로 내몰려 마녀사냥을 당해왔다. 피해자들은 그저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디지털 성범죄와 교회 성폭력의 상호 연관성 내지는 유사성을 살펴본다면, 교회는 일그러진 피해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 하나님 형상의 파괴임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디지털 성범죄의 산업 구조와 문화 구조를 지탱하는 데 일조해왔음을 알 수 있다. 교인들은 ‘남자라면 야동을 볼 수 있지.’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서 남성들의 야동 문화를 간과했고 혼전 순결만 강조했던 교회 성교육은 여성들을 성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교회 지도층이나 교단을 탓하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n번방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두 명의 대학생 ‘추적단 불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폭력을 감시, 고발함으로써 피해자를 돕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비가시적 교회, 흩어지는 교회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속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 세상에 편만한 악과 강한 자극에만 반응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의 도덕적 불감증에 저항하면서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있지만 공동체는 없는 사회에서 n번방의 피해자들은 좁고 어두운 그 방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나요?”라고 질문할 것이다. 이 질문을 “그가 고통당할 때, 우리는 어디 있었는가?”라고 바꾸어 보면 어떨까. 교회는 고통받는 타자에게 반응하고 그들과의 친교를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채수지(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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