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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를 막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 [사건과 신학]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 김유승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7-16 12:04:09
  • 수정 2020-07-16 14: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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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가학적 폭력의 사회’입니다. - 편집자 주



어느 시대에나 재난의 우선적 희생양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이다. 질병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기반들을 재빠르게 찾아내었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이차적인 문제들, 즉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 불리는 고립감과 우울감, 무기력증 등의 심리적인 문제 및 소비 위축으로 인한 경영난, 휴직, 실업 등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이들의 삶을 겨냥했다. 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구조적 불평등 가운데 정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코로나 발 가정폭력은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 맨 밑바닥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지난 4월 유엔인구기금(UNFPA)은 코로나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가정폭력이 20% 증가하고, 최소 1,500만 건의 가정폭력 사례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이러한 가정 내 폭력 사건은 주로 여성과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모든 폭력이 악한 것이지만 이처럼 힘없는 약자들에 대한 폭력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든 두 가지 아동학대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충남 천안에서는 9세 A군이 계모에 의해 7시간 넘게 여행가방에 갇혀 있다가 숨을 거두었고, 경남 창녕에서는 9세 B양이 계부와 친모에 의해 쇠목줄이 매이고, 불에 달궈진 젓가락과 후라이팬에 화상을 입는 등 잔혹한 학대 속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고 훈육을 명목으로 체벌을 정당화하며, 체벌을 가장한 폭력을 가정 내 문제로 인식하여 타인의 개입을 불허하는 문화적 관습에서 아동학대가 유발되고 또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동학대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 전환과 가정 내 체벌에 대한 법적 금지 및 아동의 양육과 보호에 대한 사회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이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왔다. 아이들은 독립적 인격체가 아닌 미성숙한 존재로서 부모의 권위적 지배 아래 양육되었고, 심지어 종족 보존의 수단이나 부모의 자산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어린이들은 종종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채, 구타, 위협, 감금, 유기, 방임, 성착취, 가혹한 노동 등에 내몰려왔다. 그럼에도 아동인권에 관한 진지한 관심과 규범적 움직임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인 1920년대에 들어와서야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아동인권에 대한 선언적 의미를 넘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적 조치들은 그로부터 다시 근 70년이 지난 1989년 < 유엔아동권리협약 >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 역사 속에 어린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로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 유엔아동권리협약 >은 아동을 보호의 대상이자 적극적인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무차별의 원칙, 아동의 최선의 이익우선,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 및 참여 등을 주요원칙으로 천명한다. 한국의 경우는 1991년에 이 협약에 가입하여 아동의 권리와 복지 향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아동의 권리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사회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은 그 사회의 진짜 속살을 보여주는 정확한 바로미터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에서 어린이는 약자 중에 약자요, 소수자 중에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하면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나아진 것이 사실이고, 현대에는 어린이에 대한 지나친 과잉보호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부재하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소수가 아니지만 여전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소수자이며, 제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약자이다. 그리고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어린이들이 다양한 학대 경험 속에서도 대부분 저항은커녕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어른들을 순전한 마음으로 따르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의탁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고난받는 아이들을 통해 어린 양 예수를 본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우리 시대의 고난받는 어린이들이야말로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예수님의 현현은 아닐까. 일찍이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은 “어린이는 타락한 인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 가운데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시는 영원한 메시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 불거진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하면서 우리가 K-방역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과 칭송으로 자부심에 취해 있는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일면들을 학대받는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가슴이 저리다. 세상의 화려한 중심이 아닌 세상의 주변부, 곧 소외된 이들의 고통이 흘러 모인 그늘진 자리, 학대받는 아이들의 마음과 몸에 새겨진 상처자국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내밀한 중심성이 드러나는 곳이 아닐까. 


이천년 전 예수께서는 ‘애들은 가라’고 외치던 제자들을 꾸짖고, 어린이들을 가까이 오게 하여 가슴에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당시 사회의 주변인 축에도 끼지 못했던 어린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세우셨다(막 10:14).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어린이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거짓 없는 순수함 때문이 아니라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진다.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어린이의 이러한 존재론적 특성을 “개방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의 결핍과 필요로 인해 자신을 타인의 도움과 간섭에 무한히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개방성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며, 어린이의 무한한 개방성은 아들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개방성과 맞닿아 있음을 지적한다. 


누구나 해맑은 미소로 옹알이하며, 발짓하는 젖먹이를 보면 단번에 무장해제를 당한다. 젖먹이는 자신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상대로 하여금 그 무엇도 할 수 있게 만든다. 젖먹이의 개방성은 상대의 개방성을 이끌어내는 근원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젖먹이는 가장 무력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무력한 존재의 무한한 개방성에 무한한 사랑으로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강하시지만, 이 무력한 존재 앞에 마음이 녹아내리시고, 긍휼과 자비로 불타오르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근원적 힘이며, 하나님의 권능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우리 시대 고난받는 어린이들을 해방하는 길은 무엇보다 그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데려와 오랫동안 숨겨져왔던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더이상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와 목소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작은 신호와 신음에도 온 사회가 무한한 개방성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은폐되기 쉬운 가정 내 아동학대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며, 아동의 권리 증진을 위해 더 많은 공공성-사회적 개입과 법적 규제-을 확보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부터 보호자가 아동에게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주는 가혹 행위를 하지못하도록 아동복지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체벌을 훈육의 방법으로 사용해온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들이 체벌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무수한 폭력이 자행되어 왔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체벌금지’라는 단어를 명문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다행히 최근 잇따른 아동학대 사건을 계기로, 지난 6월 10일 법무부는 현행 민법 915조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는 조항에 담겨 있는 징계권을 삭제하고, 자녀체벌금지를 법제화하기 위한 민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이미 1979년 세계 최초로 아동에 대한 체벌금지를 법으로 명문화함으로써 아동의 법적지위를 확고히 한 스웨덴의 경우는 우리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아이들은 돌봄, 안전 및 좋은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인격과 개성을 존중받아야 하며 체벌을 포함해 어떤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 이 법안이 스웨덴 의회에 상정되었을 때 “모든 부모가 범죄자가 되고 가정이 해체될 것”이라는 우려와 반발도 있었지만, 스웨덴 정부는 그 법의 목적을 ‘처벌’이 아닌 사회적 ‘인식전환’에 두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하여 법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2년 뒤 스웨덴은 가정에서 체벌을 사용하는 비율이 90%에서 10%가량으로 감소하는 놀라운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고, 현재는 국민 모두가 체벌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성숙한 사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예에서 보듯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 전환을 통한 학대의 예방이다. 법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전환하여, 보다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모두의 약속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 개정과 더불어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는 사회구성원들의 비폭력 의지이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교육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부모와 아동 모두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 마련과 사회서비스 강화를 통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교훈처럼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이, 학대를 막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한 법이다.


김유승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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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춘추] 재난에 은폐된 가정폭력 실질적 대책과 관심 필요하다, 충청투데이, 2020.05.14


이배근, “아동권리증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 「아동과 권리」 1 (1997), 35, 42. 


양금희, “라너, 몰트만, 젠센의 어린이신학에 관한 연구”, 「장신논단」 43 (2011), 369. 


학대로 쓰러지는 아이들… 부모의 자녀 체벌 법으로 막는다, 서울신문, 2020.06.10


스웨덴은 왜 ‘자녀 체벌’ 금지했나, 시사인, 201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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