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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정의, 평등과 차별에 대한 고민 - [사건과 신학] 교회와 신학은 어떤 자리에 서야할까?
  • 한수현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8-27 11:49:27
  • 수정 2020-08-27 11:4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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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법과 공정’입니다. - 편집자 주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20:6-7, 새번역)


마태복음에는 한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가 실려 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비유중 하나이다. 비유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오후 다섯 시에도 일꾼을 모집하는 주인 때문이다. 일꾼들이 일당을 받는 시간은 해질녘이다. 일당을 나누어 줄 시간 직전에 일꾼을 포도원에 들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결국 이 결정은 이후 일꾼들과 주인 사이의 갈등을 일으킨다. 모든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갈등은 무엇이 정의냐는 논쟁으로 변한다. 무엇이 공평한 것일까? 일한 만큼 비례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 평등한 분배일까? 예수의 비유 속의 주인은 이를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로 바꾼다. 


처음 온 일꾼들이 주인을 악으로 본 이유는 주인이 정의의 가장 기본 원칙인 평등을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정의에 대해 주인은 한 데나리온은 노동량에 비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베풀고자 하는 자비와 사랑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것을 선이라고 주장한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임금이다. 한 데나리온으로 유대식 빵(작고 얇은 호떡처럼 생김)을 10~12개 살 수 있었다. 3~4데나리온으로 12리터의 밀(15킬로그램의 빵을 만드는 양)을 살 수 있었고, 어린 양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당시 요리된 식량의 가치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30데나리온으로는 옷 한 벌을 살 수 있었으며, 황소는 백 데나리온이 들었다고 한다. 미쉬나의 기록에 따르면 한 사람이 최소 일 년에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즉 일년에 200일은 일할 수 있어야 생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돈을 벌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거나 부자들의 일을 봐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일자리가 없는 것은 자유인으로 살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음을 뜻한다.  


이 비유의 결론이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를 ‘악한 주인의 비유’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비유의 의도만큼은 명확하다. 비유가 평등과 자비를 의도적으로 충돌시킴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게 하려는 주인의 의도이다. 주인은 기회가 없었던 이었든지, 아니면 게으른 이었든지 간에 하루의 먹을 양식을 손에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설득되었던, 설득되지 않았던 간에 누구든지 한 데나리온은 얻을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좀 더 노력하면 더 많은 데나리온을 약속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나님나라는 모든 사람이 한 데나리온으로 만족하는 완전 고용의 사회이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어떻게 그런 재화와 충분한 부를 생산할 뿐 아니라 분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럴 수 없다면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최저생계가 보장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할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비유의 가치는 그 결론에 있지 않다.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평등, 정의, 법을 함께 좀 더 현실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데에 있다.  


예수의 이런 비유를 바탕으로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바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법과 정의, 그리고 평등의 문제를 말한다. 뉴욕에 위치한 리디머 처치의 담임목사 팀 켈러(Timothy J. Keller)는 그의 목회 여정과 철학을 담은 대표적 저서, 『센터 처치』에서 기독교인들의 세속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다. 어떤 이들은 도시를 생각할 때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신앙과 도덕을 저해하는 곳으로 여긴다. 또 다른 이들은 도시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사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292)


켈러는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을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 자족(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고 비판한다.(231) 더 나아가 켈러는 로마서 1,2장을 읽으며 “모든 사람은 정직과 공평, 사랑, 그리고 황금률(가장 중요한 원칙)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230) 교회만이 이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세속과 대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망각하는 행위라고 말한다.(231)  


미국 보수주의권의 목회자로서 혼합주의를 경계함에도 켈러는 이미 법과 정의에 대한 세속의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한다. 기독교적 정의는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극복해 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야 한다. 켈러는 세속의 자원을 이용하여 공공선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야 말로 복음선교의 핵심이라 주장한다.(208) 


최근 한국사회에 법과 평등에 대한 여러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재벌가들이 벌이는 불법과 편법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가벼운 이유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절대적인 영향력 때문이란 말이 돌고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은 ‘한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말하곤 했다. 


최근 ‘웰컴 투 비디오’라는 다크웹을 기반으로 둔 웹사이트의 운영자로 체포된 손정우씨에 대해 미국이 요구한 범죄인 인도요청을 거부함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이 웹사이트는 2~5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음란물이 자그만치 20만개가 유통된 곳이다. 이러저러한 법리를 떠나서 이런 판결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옳음과 평등에 대한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켈러의 말을 빈다면 교회는 사회의 법과 행정이 공공선에 유익을 끼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찾는 길은 세속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법과 정의, 평등과 차별에 대한 주제가 사회에서 공론화될 때, 교회와 신학은 어떤 자리에 서야할까? 혹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인 기독교는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또는 세속 문명의 결과물인 법의 정신에 대하여 대적문화를 세움으로 교회 안에 새로운 독립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선교적 소명이라 말하기도 한다. 


과연 사회의 법은 하나님이 아닌 악마가 준 것이며, 그 정신을 고민하지 않는 용서가 그 사회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앞에서 다룬 예수의 비유와 바울의 법과 복음에 대한 담론들은 하나님의 의를 말함에 있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법과 양심의 문제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와 신학은 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로 세우는 데 공헌해야하며, 더 나아가 그 이상의 가치와 정의를 세워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은 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세우고 또한 완성시킨다. 


법이 더욱 그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법을 확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찬란한 공헌 가운데 하나였다. 문제는 그 과정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 만큼이나 스스로를 단련하고 부정하고 헌신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은 세상권세에 복종하고(롬 13:1)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을까?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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