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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엄은 허공을 때리는 빈말이 아니다 - [글로벌생명학] 11 :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0-05 10:54:05
  • 수정 2020-10-05 10: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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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8일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는 국내 7대 종단 종교인들이 ‘생명존중 종교인대회’를 열고 생명 살리기 선언문을 발표했다.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 15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대해 왔다면서 종교인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종교인들은 “자살 문제를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교리나 낡은 관행에 얽매여 유가족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내기도 했다”면서 “생명존중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나서지 못했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노력도 미흡했으며 생명운동에 지원하거나 동참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이 자리에서 종교인들은 “생명은 더 없이 소중한 가치임을 되새기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마음과 정성,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자 한다”면서 “오늘의 선언이 생명운동을 촉발시켜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과 조직, 언론 등 우리 사회 전반으로 생명존중 문화가 확산되는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호소했다. 


한 해 1만 2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도록 사회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무한경쟁의 살벌한 싸움터로 내몰리는 현대인에게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절대 명령


▲ 왼쪽부터 전병호, 류영모, 함석헌 (사진출처=다석사상연구회)


식민지 시절, 해방 후의 혼란기, 6.25 전쟁, 그 후의 긴 독재 기간 등 일생을 자유와 독립,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며 자신의 한 몸을 사른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생명사상은 우리의 몸 속에 아로새겨진 생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함석헌이 일생 동안 추구한 화두는 ‘생명’, ‘평화’, ‘진리’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함석헌은 생명(生命)을 한마디로 ‘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풀이한다. 생명체는 그러한 하늘의 명령[뜻]을 받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개체들이다. 개개의 생명체들은 다 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아 자신의 개체 생명을 불살라[에너지로 태워] 우주 곧 생명의 역사를 돌리는 데 동참한다. 우주에서 생명체의 등장은 우주의 역사를 본래의 역사인 생명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생명체의 본래적인 삶의 목적은 우주 역사의 전개에 참여하여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다. 생명체는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읽고 그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이 생명체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하는 진리이다. 


그런 진리는 인식의 진리가 아니고 삶의 진리이다. 삶이 온갖 난관에 부대끼며 온몸의 상처로 배우는 삶 속의 진리다. 그것은 곧 개개의 생명체가 자기 안에 하늘의 뜻인 씨알을 키워내는 ‘알음’의 진리, ‘앓음’의 진리이다. 이 아픔의 경험이 앎[지식과 지혜]이 된다. 진리는 삶을 아는 ‘삶앎’의 진리가 되고 그것은 곧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의 진리가 된다. 


함석헌은 우리말에서 우리 겨레의 삶의 진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 말은 양반과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속여서 지도자로 군림하려고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어려운 외국어[한문, 일본어, 영어]가 아니라 이 땅의 씨알들이 반만 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 매일같이 사용해온 우리말이다. 함석헌은 우리 삶에서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글월[문화(文化)]이 돋아나온다고 하며 우리말로 할 수 없는 종교·철학·예술·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두라고 외친다. 


생명의 바탈은 ‘자유’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려는 하나의 뜻을 가진 생명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생명의 진화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늘나라 또는 정토의 완성이다. 함석헌은 우주 전개의 역사를 생명의 진화 과정으로 볼 정도이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느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역사는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역사는 자라나는 생명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는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또한 생명으로 인해 더욱 본래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와 생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생명은 우주의 꽃이며, 우주는 생명의 뿌리다. 그런즉 생명과 우주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다. 우주는 삶 그것이다. 자라는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여기서의 생명은 자유하는 생명이다. 우주의 역사는 생명의 ‘스스로 함’이 온갖 시련을 견디어내며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생명 펴참과 진화의 마당이라고 말한다. 고난과 시련이 없는 생명의 전개란 없다. 고난이 곧 생명의 원리이다. 온갖 부대낌과 충돌 속에서 물질은 자기 안에 생명의 틈새를 틔우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명체는 자기 안에 정신의 씨알을 영근다. 정신은 알이 드는 알음[앓음]을 통해 자기의 몸과 마음 속에 우주생명[하늘]의 뜻을 결과 무늬로 수놓는다. 따라서 생명의 역사는 생명이 맞춤[적응]과 대듦[거부] 그리고 지어냄[창조]을 통해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생명체 속에 하늘의 뜻을 씨알로 새겨넣는 앓음의 역사이다. 세계역사는 씨알로서의 민초들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 읽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화답의 장이다. 


삶이란 ‘참’을 찾아가는 여정



우주가 곧 자라나는 생명이라면 우주의 진리는 당연히 생명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전개와 더불어 우주생명의 날줄에 맞추어 개체생명들이 자신들의 씨줄을 엮어 우주의 역사를 짜나가는 것이 낱생명들의 구체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참[진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삶 바깥에 참이 있을 수 있는가? 자기의 삶을 사는 것보다 참되고 진실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온갖 형태와 방식의 삶이 다 참이다. 함석헌은 이를 한 마디로 “삶이 곧 참”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무슨 근거로 삶을 참이라고 주장하는가? 함석헌은 삶 뒤에는 언제나 절대의 명령이 서 있다고 말한다. 우리 일상어 ‘생명(生命)’에는 ‘생(生)은 명(命)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삶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때 그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가 아니라 ‘너는 살아라!’하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살 수 없으면 말자는 그런 삶이 아니다.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절대 명령이다. 삶은 그 명령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사르는 것이다. 삶은 필연이고 절대다. 따라서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사는 온갖 형태의 삶이 다 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생명체의 삶의 현상들과 행태들이 곧 참일까? 그것이 참의 한 면모를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이 곧 참은 아니라고 함석헌은 대답한다. 삶이 참이라고 했을 때, 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방향을 가리킨 것이지 삶 그 자체가 모두 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참’이란 무엇일까? 함석헌은 삶이 참인 것은 삶이 참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참을 찾아 참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인간은 ‘스스로 해나가는’ 우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스로 참을 찾아 그 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 참은 완성된 물건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가이 없는 하늘의 뜻을 말로도 글로도 생각으로도 잡을 수가 없다. 그저 인간은 참을 찾아 긴 인생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참 마음, 찬[萬] 마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참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가? 함석헌은 참 든 마음으로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이미 참이 와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마음, 참되지 못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마음은 참이다. 참이 벌써 우리 마음에 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참이며 또한 그래서 참을 찾는다. 그리하여 참을 찾아나섬이 곧 참이 된다.


참이 들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참을 찾지 않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참을 찾는 것이다. 함석헌은 선뿐 아니라 악도 그 밑은 참에 있다고 말한다. 돈을 모으자고 생각을 하는 것도 참을 찾는 데서 나온 것이며, 살인과 강도를 하는 것도 참을 찾는 데서 나온 것이다. 참을 찾노라 한 것이 그리 된 것이다. 길은 길인데 바로 가지 못하고 꼬부라진 것이다. 참 마음은 그것을 펴 꼿꼿이 하고 올바로 해야 하며 섞인 것을 없애고 순수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 찾음이며 수양이고 믿음이요, 새로남이다. 


‘참’은 무엇보다 ‘충만함, 그득 들어참’을 뜻한다. 어느 한 구석 이지러진 데가 없는, 조금 이라도 빈 곳과 틈, 흠집이라곤 없는 온전[완전]함을 의미한다. 삶이 참을 찾음이라 했을 때 이 경우 참은 바로 이러한 온전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온전함은 무한이고 절대이며 영원이다. 유한한 상대 세계의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장 48절).


생명의 그물을 함께 짜자


생명의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 즉 통함이다. 힘, 열, 기, 에너지, 정보, 마음, 정신, 영혼이 통하지 못하면 생명은 멈추게 된다. 우주의 역사 150억 년의 끄트머리에 우주의 한 구석 태양계에서 그 꽃을 피운 생명이 인간의 반생명적 처신으로 인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주 진화의 참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생명의 의미를 물질에서, 황금에서, 쾌락중독에서 찾고 있다. 소통과 화합, 비움과 나눔, 공생[함께 살기]과 상생[서로 살림] 속에 생명의 그물망은 탄탄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돈과 권력만이 살길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유일한 삶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경쟁에서 밀려 돈도 힘도 없는 우리 사회의 약자인 노인과 청소년들은 삶의 끈을 못 잡고 죽음의 유혹 속에 흔들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생명경시의 풍조 속에 함석헌 선생의 생명 존엄성에 대한 말은 허공을 때리는 빈말처럼 들리지만 우리 모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우주를 다 주어도 아니 바꾸려는 것이 생명이요, 천년을 살고도 하루같이 여기는 것이 마음이다. 우리는 백이나 천을 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요, 영원을 살기 위해 있는 것이며, 수만금 수억금을 가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무한을 가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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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함석헌의 생명진리 사상 >,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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