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이기상 교수님의 세 번째 연재 주제는 [글로벌인문학]입니다. 우리의 인문교육 현실을 돌아보며 지구촌 시대 글로벌 인문학을 조망하는 글로,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 연재합니다.
이기상 교수님은 독일 본토에서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우리사상연구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며 문화와 생명을 화두로 시대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문학 담론을 < 가톨릭프레스 >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이기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요즘은 뉴스 보는 게 두렵다. 재산, 돈 문제로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들이 보도되는가 하면, 부모가 자식들을 죽이는 사건도 전해진다. 경제적인 이유 또는 가정적인 이유로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모와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식들도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탓인지 한창 피어날 나이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다. OECD 국가 가운데 1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삶의 만년을 평화롭게 보내야 할 노인들의 자살률도 1위라고 한다.
왜 이렇게 극단의 선택을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는 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족 구성원을 묶고 있던 끈끈한 유대감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다. 사랑, 믿음, 아낌, 이해, 희생과 같은 덕목들이 뜨거운 황금만능주의 햇살 아래 아침안개처럼 빠르게 증발되고 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사회풍조가 인간성을 메마르게 만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귓전을 때린다.
“경제위기가 아닙니다. 문화의 위기도 아닙니다. 인간의 위기입니다. 위기에 빠진 것은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파괴되고 있는 것은 인간 자신입니다.”
인간! 희망인가 재앙인가?
기술과 자본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 일일생활권으로 만든 지구촌 시대, 수단과 도구였던 자본이 목적이 되어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다양성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할 여러 가지 색깔의 문화가 자본과 이념의 갑옷을 두르고 서로에게 보이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냈다. 어느 대기업의 광고 가운데 “사람이 미래다”라는 구절이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 하면 산업화의 산물인 미세먼지로 범벅이 된 스모그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산업용 이산화탄소, 프레온 가스 등이 오존층을 파괴하고 지구온난화를 가속하여 하루가 다르게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인류의 문명도 끝장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구위기, 인류멸망의 재난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 이에 대한 증명이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고 있는 결과들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미래도 희망도 아닌 재앙이다. 근대의 마지막 철학자인 니체는 인간을 ‘이 지구상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바이러스[병원체]’라고 했는데, 일명 ‘코로나19 시대’인 지금 그의 독설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인간과 그의 기술문명만 없다면 지구는 앞으로도 또 150억 년을 아무 문제없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인해 지구의 평화는 깨지고 생물종은 감소하고 생태계는 파괴되어 평화로운 다음 새천년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바로 인간이 위기다.
시대에 따른 인간 교육의 변화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롭게 짓고 꾸미고 만들어 바꾼다. 이를 위해 정보와 지식이 활용되고, 기술과 과학이 동원된다. 예술과 종교, 철학이 목표와 이념을 제공해 큰 방향을 잡아준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적 상황 속에 태어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육받아 사회 속에 편입된다. 인간이 몸담고 사는 삶의 마당은 고정된 세계가 아니고, 개인이 찾아야 할 정체성도 확정된 ‘자아[나]’가 아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기술과 과학이 발달하며, 그에 맞추어 삶의 세계도 변한다. 거기에 따라 사람의 생각과 의식도 바뀌고, 행동패턴과 소통방식도 변한다. 아울러 인간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큰 그림도 달라진다.
이런 변화의 큰 축을 학자들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이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춘 인간 교육이 있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심신합일(心身合一)을 추구하는 ‘파이데이아(paideia, 인간 교육)’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로마의 ‘문화(cultura)’ 전통으로 이어졌다. 자연을 경작하여 재배하듯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갈고 닦는 ‘인문교육’이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중심의 중세로 넘어오면 인간중심의 교육이 신중심 또는 신앙중심의 교육으로 바뀐다. 인간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homo viator)’로서 ‘믿기 위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으로 훈육되어야 했다.
근대가 되면서 유럽은 큰 변동을 겪는다.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황폐화가 된 시점에 신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의 사고에로 인식의 전환이 발생한다.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나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자는 인문(인본)주의 운동이 펼쳐진다. 이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 휴머니스트)라고 지칭했는데, 이들은 인간을 인간성에로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문교육(humanitas)’을 주창했다. 이것이 대학에서의 ‘인문학(humanities)’의 효시가 된 것이다.
지구촌 시대라는 현대로 들어오면서 문화와 문명 간의 충돌이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된다. 하나뿐인 지구에 다양한 문화권, 다양한 종교,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공존해야 하는 지구촌 시대는 ‘지구운명공동체’를 결성해야 하는 시대적 운명을 안고 있다. 하나의 문화,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신관, 하나의 인간관을 고집하면,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테러와 반테러의 악순환을 낳으며 서로를 나락의 벼랑 끝으로 몰아갈 뿐이다. 서구의 지성인들도 근대 인간중심의 인식틀에 문제가 있음을 자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서양인들이 갖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여기가 바로 ‘글로벌 인문학’이 요구되는 시점과 지점이다.
동아시아의 인문학(人文學) 전통
서양에서 인문학 전통은 그 근원이 그리스 시대의 ‘파이데이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목상으로는 로마 시대의 ‘휴머니티’의 이름을 물려받아 ‘휴머니즘’으로 불려왔다. 그런데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다른 문화권인 동아시아에도 그만큼 오래된 인문학 전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문(人文)’ 전통이다. ‘인문(人文)’은 말 그대로 자연에 아로새긴 ‘인간의 무늬’를 뜻한다. 그리고 이 인문(人文)은 ‘하늘의 무늬’인 ‘천문(天文)’과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는 『주역(周易)』에 처음 등장한다. “천문을 살펴 때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교화를 이룬다.” 동아시아의 현인들은 여기에 ‘땅의 무늬’인 ‘지문(地文)’을 보완해서 천지인(天地人) 체계를 완성했다.
조선 초 정도전은 위의 『주역(周易)』을 이렇게 풀이했다.
“일월성신(日月星辰, 해와 달과 별의 천체)은 하늘의 무늬이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무늬이며, 시서예악(詩書禮樂, 문학·역사·사상·예술)은 사람의 무늬이다. 하늘은 기(氣)로써 그 무늬를 이루고, 땅은 형(形)으로써 그 무늬를 이루지만, 사람은 도(道)로써 그 무늬를 이룬다.”
하늘에는 일월성신과 같은 ‘하늘의 무늬’가 있고, 땅에는 산천초목과 같은 ‘땅의 무늬’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시서예악과 같은 ‘인간의 무늬’가 있다. 시서예악과 같은 ‘인간의 무늬’는 비록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것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주자연의 무늬에 상응하여 이루어놓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문’ 전통은 동아시아의 인간 교육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humanities’의 번역어로 알고 있는 ‘인문학’은 그 근원을 살펴볼 때,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 속에 연연히 흘러내려온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인문학자들이 들고 나오는 단골메뉴인 ‘인문학 위기’는 어찌 보면 이 땅의 인간 교육을 서양의 인간상에 맞추려는 인문학자들의 잘못된 시도에 있는지 모른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인간 교육마저 외국이론에 의지하는 ‘인문학자들의 위기’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서양의 인문학자들은 근대의 이성 또는 지성[지능] 중심의 인간상이 편향되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새로운 통합적 인간상을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탈근대를 표방하는 학자들은 그동안 비이성적이라 해서 인간의 속성에서 제거해왔던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의 한 면모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래서 인간 본성을 논할 때 성(性), 광기, 폭력 등에 대해 새롭게 관심가질 것을 촉구했다. 이성이 강조되는 배후에는 남성 중심적 인간관과 서양 중심적 세계관이 깔려있다. 현대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편향된 인간관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의 반 이상이 여성이고, 세계의 70% 이상이 비서구인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인간관이 요구되고 새로운 인문학이 요청된다.
글로벌 인문학의 시대적 필요성
어느 ‘기러기 아빠’의 자살은 우리 인문교육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타지나 외국에 보내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경우가 우리의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목숨을 거는 나라! 수능 점수가 조금 떨어졌다고 자살하는 청소년! 이렇게 이 땅에서는 ‘교육’이 오히려 아이들과 부모들을 죽음의 위험으로 몰고 있다.
인문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다운 됨됨이를 교육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핵심은 “사람됨 + 교육”이다. 사람됨을 어떻게 규정하며, 그에 맞갖은 교육방법을 찾아 어떻게 실행하는가가 관건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교육계는 ‘인간 교육’이 실종된 상태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유치원에서는 초등학교 뺨치게 온갖 과목들을 가르친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의 공부 외에 몇 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과외공부에 시달린다. 온통 교육에 둘러싸여 지내는 아이들이 정작 중요한 사람 됨됨이에 대한 교육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저 점수 올리기 위한 공부고, 수능 잘 봐서 좋은 대학 가기 위한 공부다. 온 집안 식구들이 좋은 점수에 목을 맨다. 삶의 목적이 점수가 되어버렸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 번 근본적으로 반성해볼 때다. 늦지만 이제라도 다시 인문교육을 생각해볼 때다. 지구촌 시대 글로벌 인문학을 조망해보며 우리 현실을 되돌아볼 때다.
< 인간이 위기고 인문교육이 문제다 >, 『경향잡지』 2014년 1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