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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능력
  • 이기상
  • 등록 2020-12-21 10: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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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공감인’


인간을 문화적 존재로서 ‘공감인’으로 규정하고, 공감을 감성·지성(이성)·영성의 통합적 능력으로 풀이한 사람이 있다. 바로 유명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다. 그는 저서 『공감의 시대』(이경남 옮김, 민음사, 2010)에서 인류의 문명을 커뮤니케이션과 엔트로피의 변증법적인 상호 역학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생존과 공존, 그리고 발전의 사건으로 본다. 


리프킨은 이런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내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에 한정해서 보려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이라고 지적한다. 인류의 문명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 외에도 감성적 능력과 영성적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 능력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해서는 안 되며 그 세 능력을 아우르는 통합적 능력을 핵심축으로 산정해야 한다. 그것을 리프킨은 ‘공감’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은 ‘공감적 문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인간도 ‘공감인’(호모 엠파티쿠스, homo empathicus)이라는 명칭을 받게 된다. 


리프킨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커뮤니케이션이 전 지구를 신경망처럼 휘감아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정보의 그물망 속에 서로 이웃하여 사는 코스모폴리탄 시대인 현금은 또한 극도의 엔트로피 증가로 지구 전체가 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는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공감력을 극대화하여 생물권 의식 속에서 지구 위의 모든 자연사물·생명체·인간들이 함께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연대감과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 것뿐이다. 리프킨은 인류의 문명을 공감의 문명으로서 인간의 공감력이 씨앗의 상태에서 싹이 터 잎을 맺고 줄기를 형성하고 가지를 치며 꽃을 피어내는 공감력 증대의 역사로 본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는 우리가 가진 공감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공감의 시대’이다.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


▲ ⓒ 가톨릭프레스 자료 사진


리프킨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공감’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 능력은 모든 인간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조건으로 인간의 친척인 영장류와 포유류의 조상에까지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는 ‘공감’을 인간에게만 한정지어 특수화시키지 않고 다른 생명 종으로까지 관련성을 확대하면서 공감의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미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물학적인 몸에 바탕을 둔 공감이 가장 인간적인 독특함임을 강조하면서 동물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인간이 이룩한 공감의 문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이 계속 발전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리프킨은, 공감보다 앞서 나온 단어는 ‘동정’(sympathy)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동정은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공감은 동정과 정서적으로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실제 둘은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리프킨은 ‘공감’이라는 용어가 독일어 ‘Einfṻhlung’(감정이입)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한다. 감정이입은 관찰자가 흠모하거나 관조하는 물체에 자신의 감성을 투사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용어로, 실제로는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즐기는 원리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빌헬름 딜타이는 이 미학 용어를 빌려와 정신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에게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1909년에 미국의 E. B. 티치너는 ‘Einfṻhlung’을 ‘공감’(empathy)으로 번역했다. 공감의 ‘감’(感, pathy)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공감이 수동적인 입장을 의미하는 동정과 달리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하여, 관찰자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그들 경험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감은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객관적으로 상대를 관찰하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같이 깊이 헤아리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마치 나의 마음과 같이 체험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모두 버리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공감은 자신의 입장으로 상대방의 존재가 거부감 없이 밀려들어와 나의 내부에서 ‘어울림’의 공명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집단과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감은 ‘인식’에서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져야 


이렇게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 놓고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비록 일대일의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감정·느낌·생각 등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탐구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관계의 강도는 더 강해진다. 그렇다고 자신을 버리고 전적으로 상대에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과 개인에 대한 이해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봐야 한다.


리프킨은, 공감에서는 감정적 반응과 실천적 반응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호모 엠파티쿠스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필요를 인식하며, 또 마땅히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한다. 인식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의지적 행동적 요소로 이행되어나갈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정적 자선과 공감적 자선을 구분한 것이 주목된다. 교황은 이렇게 묻는다. “자선을 베풀 때 상대방과 눈을 마주쳤습니까?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돈만 던져주었다면, 그것은 공감과 연대의식이 결여된 오만한 동정이라고 말한다. 공감은 인식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인격적 만남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울타리를 넓혀보자, 공감만이 살 길이다


세계적 생물학자 폴 에얼릭과 심리학자 로버트 온스타인은 저서 『공감의 진화』(고기탁 옮김, 에이도스, 2012)에서 현대의 인류를 위기의 지구인으로 칭하면서 ‘외줄에 선 인류’에 비유했다. 이들에 의하면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둥근 녹색 행성에 사는 지구운명공동체의 일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국가에 속한 국민인 동시에 지구의 가족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인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 문명은 수많은 난제에서 비롯된 새롭고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저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가족관계의 패턴과 공감 능력”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에도 ‘타인’을 ‘우리’로, 똑같은 사람으로, 한 가족으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다른 가족이나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보다 결집되고, 평등하며, 안전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설 수 있다고 본다.


저자들은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가족의 유대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산업발전 규모와 과학 기술력에 보조를 맞춰 가족과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세상은 우리가 우리와 남을 구분하며 소집단을 지향하는 데서 비롯되는 온갖 윤리 문제로 가득하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과 과제 중 하나는 한편으로는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상대주의를 공감 강화의 문제와 균형을 맞추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이란 개념을 세계적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도전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천명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은 공감력에 관한 한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경쟁과 갈등으로 날카로워진 요즘 특히 상대를 나와 똑같은 인격으로 보는 공감적 소통이 필요한 때다. 그리고 ‘우리’의 울타리를 넓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 공감의 인문학 - ‘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능력 >, 『경향잡지』 2014년 11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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