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주간 토요일(2021.1.9.) : 1요한 5,14-21; 요한 3,22-30
한처음에 사람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창세 1,27), 사람들이 당신을 닮지 못한 채 세상의 죄악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갈라 4,4-5. 입당송).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느님을 닮을 때 행복할 수 있고 이를 구원이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설계하신 인간 존재입니다. 생명의 존귀함이라든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바로 이러한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닮는 길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이고 그래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행복과 구원을 담고 있어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부활의 은총이며, 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가기 때문에 ‘큰 바위 얼굴’ 효과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본기도).
자녀가 부모를 닮아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지닌 유전자 정보가 자녀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체적 특징에 더해서 부모의 기질이나 성격 또는 정서적 지향이나 가치관까지 전달되는 과정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을 함께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문화적 요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체적 차원의 일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일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적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서 얻게 되는 은총이 행복이요 구원이라면,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되는 계기 또는 원인은 기쁨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가운데 기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모를 정서적으로 닮게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기쁨이라는 에너지가 없으면 이 닮음의 과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영적으로 닮아가는 과정 또한 이와 마찬가지여서 이를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문화라고 부릅니다. 이 문화 속에는 기쁨을 알고 나누며 전하기 위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교리와 성사, 전례와 실천, 개인들의 삶과 함께 하는 공동체 등이 그러합니다. 토착화나 선교의 활동도 이 기쁨의 문화를 진정성 있게 공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길을 준비하려고 온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3,28).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황송해 했던 것이고, 그분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시자 더 없이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요한 3,30). 그가 와서 세례운동을 전개하면서 사람들에게 촉구했던 회개는 도덕성을 회복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자는 호소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을 예비하는 전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공동선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함으로써 사회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일은 선교 활동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공유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함양하고 민족의 화해를 지향하는 노력 또한 그렇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담긴 진정성과 여기서 느끼는 기쁨이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초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메시아 공현을 실현시키는 경배의 문화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격적으로 신앙을 뿌리내리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지향으로 예수님께 청하면 그 청은 반드시 들어진다는 것입니다(1요한 5,14-15).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사는 형제들이 행복과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초대하려는 청원 기도를 예수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1요한 5,16). 다른 무엇보다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하겠다는 데 그들이 거부할 리가 없으며 게다가 성령께서도 악마가 더 이상 사악한 간계를 부리지 못하게 강력하게 보호하실 것입니다(1요한 5,18).
문제는 우리의 진정성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온전한지, 그리고 그 기쁨을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고자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이해력이 열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1요한 5,20). 그렇게 되면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시편 149,5. 화답송).
신앙의 흐름은 바다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다는 바람에 밀려 수평으로 움직이는 표층 해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온도와 염도의 차이로 수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심층 해류에 의해 끊임없이 그리고 더 크게 움직입니다. 온도와 염도가 높은 물은 더 낮은 물로 삼투해 들어가서 동일한 온도와 염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이 움직임이 결국 바다를 더 크게 움직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던 아나빔들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큰 빛을 비추는”(마태 4,16. 복음환호송) 경배의 문화도 그렇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공현의 기쁨을 삼투시켜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모두가 행복하고 또 구원되도록 움직일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