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2022.10.23.) :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를 위해 설립되었고, 전교를 통해 존재 이유를 실현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교는 선교 또는 복음화라고도 부릅니다.
복음화의 전망, 진리와 평화
복음화의 전망을 펼쳐 보인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11; 52,13-53,12)로 매우 선명하게 그려낸 예언자입니다. 그가 지닌 예언자적 상상력과 통찰력은 탁월하여 메시아가 고난받게 되는 원인도 꿰뚫어 보았으니, 그 정확성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그의 예언(이사 61,1-2)을 인용하신 것에서 확인됩니다(루카 4,16-21).
이사야가 내다본 메시아 고난의 원인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때문인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해서라도 수행해야 할 그 위대한 사명이 가져다줄 미래 전망까지도 내다보았습니다(이사 2,3). 그 미래란 새로운 ‘예루살렘’과 그 도성의 언덕인 새로운 ‘시온’에서 진리가 퍼져 나오고 이 진리가 바탕이 되어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진리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이야말로 복음화의 열매입니다.
선교 명령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끝까지 진리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마태 28,18)을 당신이 지니고 계심을 공표하면서, 이 전권(全權)으로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노라고 다짐하는 한편, 이 현존 약속을 믿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와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과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타의 다른 자연종교들의 가르침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진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의 제2천년기 내내 서방 교회 선교사들이 이 선교 명령을 진리와 평화를 실현하기보다는 여타 종교의 신봉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킬 명분으로 삼은 결과, 예수님께서 명하신 보편적인 복음이 종파 차원의 주장으로 협소해졌음은 물론 종교 간 대결을 초래하는 개선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마주친 아시아의 전통 종교들은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 존중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보다 더 심오한 영성을 지닌 고등 종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들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주쳤던 토속 종교들을 대했던 것처럼 아주 간단히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으로 간주하고 말았습니다. 이 바람에 엄청난 문화적 충돌과 갈등이 빚어졌으며,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백 년 동안 최소 2만 명이 애꿎게 치명해야 했던 끔찍한 박해를 초래한 조선의 조상제사금지령도 그 한 예였습니다. 만일 이 금지령(1715)이 내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애초에 중국의례논쟁으로 촉발되어 반세기 전에 또 다시 내려져 있었던 이 금지령(1742)을 조선시대 한국인 신자들에게도 막무가내로 적용하기 전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 실상을 파악했더라면, 한국교회의 운명은 물론 조선왕조의 국운과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격동의 국제정세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시아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비극과 불행이 예방되었을 것은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박해가 종식되고 나서(1886; 1899) 한 세대가 지나서야 뒤늦게 조상제사금지령을 취소했습니다(1939). 하지만 이로 인한 박해로 희생된 신자들 중 일부를 시복시성했을 뿐 공식 사과는 없었고 이 금지령으로 인해 배교자로 몰린 이들에 대해서도 그 어떠한 명예 회복 조치를 지금까지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희년을 맞아 교회가 인류 앞에 참회한 문건 「쇄신과 화해」에서도 유독 이 문제만큼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이 무색하게도, 원인이 무효가 되었는데도 결과는 무효화되지 않고 있는 미해결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태는 과연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요청하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선교,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
예수님께서 받으신 전권은 그리스도교가 종교로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내다본 진리와 평화의 현실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확인해 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쳐라.” 하는 삼중의 선교 명령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이스라엘에서 보여주신 삶을 가감 없이 이어받아야만 이 현실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복음화의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가 아니라 이웃으로 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어야 하고, 교회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는 교세 확장의 수단이 아니라 선교사들은 물론 세례받는 이들도 예수님처럼 살기를 다짐하고 당부하는 진솔한 표현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세례를 베푸는 이들이나 세례를 받는 이들 모두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진리와 평화의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의회의 관점에서 보면, 진리와 평화의 복음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되어있는 백지수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만이 실현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약속어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시아 대륙의 선교 실패 사례를 통해 교회가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세계의 선교 상황이 아직 출발선상에 머물러 있다.”(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1항)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언급이 그것입니다. 아시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데다가, 또 이제까지의 모든 선교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게 된 덕분에 아시아 교회는 예수의 선교를 재현할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도 이 언급은 아시아의 선교 상황에 정확히 적중합니다.
시선을 세계로 돌려보면, 모든 형태의 빈곤과 소외로부터의 자유를 열망하는 사조가 지구촌 전체에 확산되어 있다는 것이 21세기에 나타나는 시대의 징표인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선교가 이 빈곤과 소외를 부채질했었다는 역사적 기억이 뼈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아시아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1974년에 결성된 아시아 주교 연합회의(FABC)가 열릴 때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였습니다.
25년에 걸쳐 숙고한 끝에 아시아 주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야 할 세례’의 명령을 선교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세례 예식상의 선언만이 아니라 삼중(三重)의 대화 필요성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즉, “아시아에서 복음화를 이룩하려면 전례적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 아니라 아시아 종교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서구화된 그리스도교 문화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들과도 대화를 해야 하며, 서구화된 엘리트가 아니라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선교의 출발점을 삼고 노력한다면, 아시아의 종교 전통을 물려받고 있고 또한 아시아적 문화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이 빈곤과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도움으로써 아시아의 복음화가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즉, 아시아 선교는 전통 종교와 대결하여 교세 경쟁이나 개종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감수성을 존중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이웃으로 삼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1998년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표명된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입니다.
서구교회의 역사적 책임,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명
성령께서 아시아의 주교들의 성찰을 통하여 내려주신 이 자각이 아시아 복음화의 발판인데, 이를 위해서도 로마의 복음화를 내다본 로마서 안에 담긴 권고가 아시아의 상황에서도 절박합니다. 로마서는 로마의 복음화를 선교적으로 기대하며 쓴 편지로서, 사도 바오로가 지닌 사도적 성찰과 선교적 체험의 종합판이었으며, 과연 그가 로마에서 치명한 후 2백여 년 만에 로마제국은 박해를 멈추고 신앙을 공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권고했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복음을 고백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하는 호소는 새로운 선교 출발선에 선 아시아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절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의 선교를 재현하려는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도 – 서양에서는 더 이상 선교사로 자원할 인력도 없거니와 - 자신을 봉헌할 아시아 선교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종교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본격적으로 증거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아시아인들은 예수님을 서양 성현으로는 인정하지만 하느님으로 믿지 않고 있어서 아시아 선교의 요체는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데 그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느 종교 창시자 성현들과 반열이 다른 존재로서 하느님이심을 믿고 있으며 또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도 받고 있습니다(아시아 교회, 10항).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는 법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41항). 그래서 예수의 선교를 출발선상에서 재현해야 하는 아시아의 선교 상황은 차라리 축복입니다. 이전까지의 역사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예수의 선교를 계승하여 아시아 복음화와 사랑의 문명이 성취될 경우에, 서구교회 역시 아시아 교회로부터 얻는 선교적 활력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재복음화를 덩달아서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구유럽교회의 역사적 책임이며 또한 아시아에서 가장 서구화되었으면서도 아시아 지역 교회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중재 역할을 요청받고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원래의 선교를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서 정확하게 실천하여 ‘사랑의 문명’을 이룩한다면, 거기서 비추어지는 진리와 평화의 빛은 보편교회와 온 인류를 비출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보편교회로부터 기대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들의 복음화 지평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사야 예언자가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에게 외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진리의 빛 속에 걸어가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