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 이기우
  • 등록 2022-11-26 17:39:12

기사수정



대림 제1주일(2022.11.27.) : 이사 2,1-5; 로마 13,11-14ㄱ; 마태 24,37-44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오늘은 대림 제1주일로서 새로운 전례력의 새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보다 한 달 먼저 한 해를 시작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 드리운 어둠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의 빛과 어둠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뒤바뀌어 찾아오고 알아서 새 해가 오지만, 인간 세상의 빛과 어둠은 사람들의 양심이 신앙으로 조명되어야 하느님의 빛을 반사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가 대림 시기로 한 해를 앞서 시작합니다. 


가로등 신사


어느 초겨울 밤에 한 신사가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말을 건넸습니다. “뭘 찾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 신사는, “동전이요.” 하더니 행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머니에서 손전등까지 꺼내더니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비추어가며 찾길래 또 물어보았답니다. “어디서 잃어버리셨어요?” 그랬더니 “저어기에서요.” 하길래, “아니, 그러면 잃어버린 데에서 찾아야지 왜 여기서 찾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행인에게 돌아온 대답이 이렇습니다. “저기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니 가로등 밑을 찾아보고 있는 거지요.” 밤새워 찾았지만 그 신사는 동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인공의 빛, 하느님의 빛


인류는 그동안 어떤 시대에도 이룩하지 못한 찬란한 물질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을 수 있었던,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었던 양심의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빛은 스스로 만드는 빛이 아니고 하느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시킬 수 있는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다시 본래대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하느님 없이, 그분이 만드신 온갖 피조물의 원리와 메카니즘을 구명하려 합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행복하려 하고, 하느님 대신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하면, 하느님 없이 인간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어 보려 하고 있습니다. 가로등 신사입니다. 이미 창세기에 쓰여 있는 창조 설화에는 가로등 신사의 선택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 대신 눈이 밝아지려 했던 그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가 ‘가로등 신사’입니다. 현대 인류가 이룩한 물질문명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에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


로마 문명을 이어 받은 유럽 문명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가 떨어져 나간 후에도 여전히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이건, 프로테스탄트이건 유럽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문명으로 에덴동산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서 에덴동산을 만들고자 이주했습니다.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대륙에서 살던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신세계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미국 문명 역시 에덴동산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1952년에 미국 작가 존 스타인백이 ‘에덴의 동쪽’이라는 대하소설을 썼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해밀튼 가족과 이미 동부에 정착했다가 서부로 다시 이주해 온 트라스크 가족의 몇 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작품입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여 역시 다양한 갈등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서부에 정착해 나간다는 스토리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아담입니다. 거기에 농장을 개척하는 중에 별별 갈등이 다 일어나고 끝내 불화 속에 지내던 부모를 죽이고 사실상의 생모로 판명된 포주까지 죽이는 죄까지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가가 드러내려 했던 주제와 상관없이 그 주제를 위해 동원된 주변적 사항들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낸 ‘미국 최초의 대하소설’이라느니,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최초의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었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소설과 좀 다르게 아담의 두 아들 중 반항적인 둘째로 묘사되었는데 그 배역을 맡은 제임스 딘의 연기가 돋보였던 까닭에 그가 입었던 청바지까지 유행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에덴의 동쪽’은 미국판 가로등 신사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언자와 사도의 꿈, 그리고 예수님의 경고


이사야 예언자는 세월이 흐른 뒤에 세상 사람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보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드는 미끼가 탐욕인데, 이 탐욕의 산이 높게 쌓이고 있지만 이 산보다 더 높게 주님의 집이 세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 술 더 떠서, 지금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역설했습니다. 양심을 재웠던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고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빛이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가들도 그 빛을 기원으로 삼아 인류의 역사를 그 빛이 비추이기 전과 비추인 후를 구분합니다. 기원 후 역사를 사는 우리는 그 빛 아래를 떠나서 인공으로 비추어진 가로등을 찾아갈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서 깨어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만일 이 빛을 떠나서 가로등 빛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네 양심이 빛을 받아 비추일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양심이 잠드는 것이고, 그 빛을 떠나서 아무리 열심히 찾아봐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찾아봐야 원래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발달한 물질문명 덕분에 역시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편리해진 생활 속에서도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로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더 가지면, 또 더 높이 올라가면 행복할 줄 알고 애를 써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더 멀어져갑니다. 


학문과 때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발견해보려 애쓰지만 그 성과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불행을 확인하게 해주는 그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거나 양심이 바르게 잡히기를 소망하기보다는 외적인 환경이나 운명이 좋아지기만을 헛되이 소망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새 해를 상징하는 사진이 떠오르는 해를 찍은 일출 사진이지요. 어느 해나 똑같습니다. 


새 해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새롭게 맞이하는 해가 진정으로 새로워지려면 우리 마음에 해가 떠오르면 됩니다. 그러면 그때가 바로 새벽이요 새 해가 됩니다. 우리네 양심이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지도록 깨어 있으면 새 날이 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추는 빛도 밝아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양심이 인간 의식의 핵심과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라면, 양심이 신앙의 조명을 받음으로써, 인간 의식이 영성의 진화로 이끌려지고 인류 문명이 하느님을 되찾을 때라야 비로소 인간과 인류는 본연의 진화 궤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 인류와 인간은 영적인 방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유의 반어법으로 영적으로 방황하는 우리네 세상을 빗대셨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 시에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대림 시기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는, 정신을 차리게 하시려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더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밝은 색으로 밝기를 더해가는 대림초도 이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주어진 이 초대는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먼저 양심을 하느님의 빛을 향해 바르게 하고, 우리의 삶을 밝게 하며, 우리네 인간관계를 밝게 하고, 우리 사회를 밝게 하며, 마침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밝게 비추려는 각오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주어지는 기회 속에 담겨 있는 은총을 알아보고,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바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해마다 똑같은 일상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되풀이하다가, 인생을 허비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더 밝게 만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성서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필사되고 보존되어 온 것이고, 전례가 연중 하루도 빠짐없이 거행되고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쳐 세우신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수많은 값지고 귀한 은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말 그대로 양심(良心) 즉 좋은 마음으로 만들라고, 바꾸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빛이 비추이면 그래서 하느님께서 함께 사시는 에덴동산이 되면 이것이 바로 내심낙원(內心樂園)입니다. 


우리들 마음에 이룩된 저마다의 내심낙원에 구세주께서 오실 작은 구유를 하나씩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 마음에 마련한 작은 구유 앞에 작은 촛불 하나씩 켜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하느님이 빛이 태어나시는 거룩한 탄생, 즉 성탄(聖誕)을 준비합시다. 기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다 함께 시작합시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이 은총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