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화제가 되어 들여다보았다. JMS,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한국사회 종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들을 보도했다. 한국사회의 갈등과 분열, 혼란과 광기의 한복판에 종교가 있다.
코로나19 시대 종교에 무심하던 시민들도 ‘신천지’라는 교회를 알게 되었다. 최근엔 천공이라는 자의 망발인즉, “일본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일본에 당한 사람은 없다”라고 하여 국회 외통위가 난리법석이다.
새로 선출된 여당의 최고위원들이 전광훈 목사를 찾아갔다. 전 목사는 “이번에도 우리가 김O현 장로님을 사실 밀었잖아. 밀었는데, 아니, 세상에 우리한테 찬물을 끼얹은 점 뭐냐 하면 헌법 정신에, 5.18 정신을 헌법에다 넣겠다. 그런다고 전라도 표가 나올 줄 압니까?” 그는 여당의 전당대회에도 공공연히 개입했다.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할 정도이지만, 개신교단 어디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도 그에게 바른말 하는 성직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다. 과학의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왜? 어떻게 급진적이고 비이성적인 사이비종교나 맹목적인 주술행위, 극단적인 정치적 혐오와 편견으로 빠져들고 있는가?
불안과 공포에 점령 당한 사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Ernst-Dieter Lantermann)은 불안한 현대사회의 급진적, 광신적 경향을 분석하고 그 심리적 공통점을 탐구한 ‘불안사회’를 출간했다. 지금 우리는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급변의 시대를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그 변화를 견인하며 급진적 사회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란터만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급격한 변화, 확실성의 소멸, 예측 불가능성으로 정리한다.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이 현대인의 불안을 야기하고, 불안한 심리 상태가 급진화된 양상으로 표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불안은 밖으로 터져 오르며(anger) ‘분노사회’를 만들었고, 안으로 잦아들고 눌려서(depression) ‘우울사회’를 만들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나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과도한 경쟁이 만들어낸 과도한 자기애와 이기심, 고독사, 자살률과 자살 증가율 세계 최고, n번방 사태를 통해 바라본 범죄적 성문화, 성폭력, 부동산과 비트코인 주식 등에 투자하는 재테크 열풍, 사회적 불공정과 사법부에 대한 불신 등은 끊임없이 불안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이라는 개념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국 사회는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에 점령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정부와 지자체가 내놓는 대책이란 ‘번개탄 생산금지’와 ‘떨어질 만한 곳에 펜스와 안전난간 설치’, ‘인천대교에 추락 방지 드럼통 1,500개 설치’라는 우스꽝스러운 행정이 진행 중이다.
종교가 권력, 돈 그리고 성(性)과 결합하면
누구나 무언가에 중독될 수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처리할 수 없는 고통을 숨기거나 제거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 상담을 하다보면 “그동안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종교중독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많다. “성직자의 말을 신의 말씀으로 믿고 신앙·종교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시간이 아쉽다”라고 고백하는 내담자들을 많이 만난다. 통상적으로 ‘독실하고 건강한 신자’라고 부르는 모델이 사실상 ‘종교중독자’인 경우들이 많다.
대한민국‘종교중독’ 현상이 만연하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자리나 위치에 있으면 절대적으로 맹종하거나 무오류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대통령이 하는 말인데, 나라에서 말하는 것인데, 교회에서, 성당에서 말하는 건데. 목사님이, 주교님이, 신부님이, 교주님이 말하는 건데...” 그들은 어느새 신(神)이 되어버렸다.
무소불위, 권력을 가지고 돈과 성(性)을 향유한다. 문제의 교주들은 모두 범죄혐의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 있거나 이미 사망했다. 종교가 권력, 돈, 그리고 성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종교폭력(종폭)’을 자아내고 있는 끔찍한 아수라장을 바라보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사제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씁쓸하다.
종교는 이미 정치, 경제, 문화, 교육에 전방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보이지 않는 어둠의 권력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기성 종교들에서 일탈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흥종교에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이 몰리는 이유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러한 종교조직들이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중독에 쉽게 빠지게 된다. 부모와의 갈등, 학대 경험, 상실의 고통 등 여러 가지 취약한 상태에 놓인 실존들과 정서적인 불안과 혼란 가운데서 성장한 사람들이 종교중독에 쉽게 빠져든다. 그들의 결핍된 사랑과 인정 욕구가 종교를 찾게 하고, 종교중독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종교(re+ligion), ‘반복 음미하다’ ‘다시 묶다’
대가(代價)를 치르지 않은 현실은 언젠가 더 큰 비용을 청구한다
‘종교(religion)’의 어원을 돌아본다. 라틴어 “re(다시) legere(읽다)”는 ‘다시 읽다’ ‘반복 음미하다’ ‘숭배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종교는 다시 읽고 또 읽어 음미해야 한다. 읽지도 않고 교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긍정의 과잉현상(축복, 무엇이든 잘 되리라!)’이 종교를 멍들게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re+ligion)’의 어원으로 ‘re(다시) 묶는다(ligare)’가 있다. 일상의 고통, 실존의 어려움을 내 존재와 분리하지 않고 묶어서 연결하는 것이 종교이다. 실존과 분리된 종교는 ‘아편’이다. 우리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고 진실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모든 행위가 중독으로 성장한다. 대가(代價)를 치르지 않은 현실은 언젠가는 더 큰 비용을 청구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권위에 대한 의존이 자기 내면의 모습을 회피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면 종교중독에 빠지게 된다.
종교중독자들은 사고·가치·선호 등을 명료한 범주 안에 넣으려 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두 가지 범주, 특히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는 편협한 사고방식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문제다. 천사와 악마, 선인과 악인, 빛과 어둠 등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중간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도 악하고 악인도 때로는 선하다. ‘중도(中道)’라는 것은 물리적인 가운데가 아니다. 중도란 바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핵심을 지르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의(□) 핵심을 질러(|), 있는 그대로 보는 것(中)이다.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연기’의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과 화해하고 타인과의 수평적이고 건전한 관계 형성을 통해 ‘신(神)’과의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중독의 근본적인 치유 방법이다. 대통령을 바라보면 한숨이 나오다가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천공이니 건진이니 하는 법사들의 국정농단과 신천지, 사랑제일교회 등과 온갖 사이비종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어 버린 그가 한심하기도 하고, 기성 종교 성직자들의 방관과 침묵이 야속하다.
이 칼럼은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