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믿음의 본보기
  • 이기우
  • 등록 2023-08-08 17:09:40

기사수정



연중 18주간 수요일(2023.8.9.) : 민수 13,1-35; 마태 15,21-28


시나이 광야를 거쳐 요르단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파란 광야에서 드디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한 사람씩 열두 명이 뽑혀 사십 일 동안 정찰을 하고 돌아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보고 내용이 엇갈렸습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것과, 그 땅에는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정찰보고 내용이 같았지만, 열한 명은 그 가나안 땅에 사는 원주민들이 힘이 세게 보였고 거창한 성채에서 살고 있었다고 보고한 반면에 오로지 유다 지파에서 나온 칼렙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원주민들과의 충돌이 두려웠던 열한 명은 겁을 먹은 나머지 정찰한 땅에 대하여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었고 이에 더해 백성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이 정찰했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광야에서 사십 년을 더 고생하도록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들이 수명을 다하고 죽고 나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 믿음을 갖추게 될 때라야 새로운 땅으로 들여보내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사십 년이나 지체해야 했는지 하는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습니다. 제자들 열두 명 가운데 유디만이 일찌감치부터 딴 마음을 먹고 재빠르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나머지 열한 명은 스승께 대해 우직스럽게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문제는 그 믿음이 여물지 않고 어리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정을 하시고 티로와 시돈이라는 해안가 이방인 지역으로 넘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귀든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이례적일 만큼 극성스럽게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졸랐습니다. 이미 제자들의 미적지근한 믿음을 따끔하게 깨우쳐줄 본보기를 찾고 계셨다는 듯이, 예수님께서는 부러 그 여인과 밀고 당기기를 하시면서 믿음을 떠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그 가나안 여인은 끈질기게 버티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가나안 여인의 당당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 여인의 딸을 낫게 해주셨으며, 제자들은 그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믿음의 본보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나이 광야에서 요르단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면서 거짓 소문까지 퍼뜨리던 행태에 대해 진노하신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기적들을 많이 목격하고 체험해 놓고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나안 여인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이유 또한 이방인 지역이라 우상숭배가 창궐해서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웠을 텐데도 오히려 제자들보다도 더 큰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과 줄다리기를 하신 과정을 곱씹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우라는 듯이 일부러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목말라 하시고 필요로 하십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나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행할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한참 모자랐던 이스라엘 백성은 벌을 받은 것이고,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이 해방되기를 바라서 예수님의 구마 능력을 믿었던 그 여인은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엇갈린 운명을 오늘 말씀에서 들으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바는 이것입니다. 노예근성이 배어있는 무리들을 데리고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과, 믿음이 여물지 않은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파스카 과업인 복음화에 있어서나, 개인적이건 구조적이건 악에 대항하는 공동선의 과업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절실히 청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온 겨레의 숙원인 민족 화해를 넘어 우리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염원했던 민족 복음화 과업이나 보편교회가 한국교회에 기대하고 있는 아시아 복음화 과업은 70년째 지속되고 있는 민족 분단의 질곡 속에서 지체되고 있으니,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치룬 벌보다 더 긴 고난에 가로막혀 있는 셈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복음화 과업을 수행하기에 걸맞는 교회 쇄신이 요청되는데 한국교회는 이미 40년 전에 사목의안을 공표함으로써 그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으나 현재는 사장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도,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믿음의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정을 익히 알고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단과 신자들에게 여러 메시지로 신신당부한 바 있는 교회 쇄신으로 보편교회가 기대해 마지않는 믿음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