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수요일(2023.9.13.) : 콜로 3,1-11; 루카 6,20-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을 아울러 선언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천명하신 당신의 사명을 실천하신 셈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서 하나의 기준이었습니다. 구원의 기준이요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세상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현세에서 이미 지옥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당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그 방식은 일단 그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병고에서도 해방시켜주고 마귀도 쫓아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필요하다면 가난에서 벗어난 다음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나눌 줄도 아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가난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꼭 필요한 물질적 재화가 부족해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소외를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난은 죄라고 말하고 있는 현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치 개인의 가난이 본인의 무능력과 게으름 탓이라고 낙인찍는 사회적 억압이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구조적인 원인,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환경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가난한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배움이 짧아서 편하고 높은 소득을 올리는 일에 종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힘들고 어려우며 위험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일이 가난의 업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병들기도 하고 쉽게 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기도 합니다. 일단 병에 걸리면 치료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의료비도 들지만 치료받는 동안 일을 쉬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수입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이 많고 아픈 사람은 가난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난의 현실은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께서도 성장 과정에서는 물론 공생활 내내 당신의 현실로 삼으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난한 처지에서, 늘 먹을 것이 모자라 배고픈 처지였고, 제자로 부른 사람들도 배불리 먹이기 어려웠던 처지였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당신이 가지셨던 모든 것을 내어놓는 나눔이었습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면 모두가 가난해지겠지만 모두가 굶주리지는 않을 수 있었습니다. 풍족하지 못해도 슬퍼서 울지는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을 지옥만큼이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세상의 대책은 달랐습니다. 저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배불리 먹으려고 하며, 그것도 모자라 더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발견되는 분쟁과 전쟁과 식민지배와 이에 대한 저항의 투쟁들은 다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가져다주신 예수님께서 나눔을 거절하는 부유한 이들에게는 불행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본을 우상처럼 섬기는 자본주의 세상이 과거보다 더 풍족해졌어도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견제하고 갈등하는 현실이 그 불행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과 싸우셨습니다. 그런 세상의 생각이 오류라고 비판하셨고 그 생각에서 나온 실천이 죄악이라고 단죄하셨습니다. 그래서 쫓겨나셔야 했고 모욕과 중상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싸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행복을 성취한 결과만이 아니라 행복을 누리기 위한 과정 자체도 하느님 나라임을 역설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에서는 상식과 오류,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과업에 대해서도 시끄러운 난리 법석을 피웁니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기득권자들이 세상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의 횡포와 오만은 나라 안에서만 벌어지는 현실이 아닙니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다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이 유일한 예외일 정도로, 국제 사회의 현실에서도 가난한 나라들이 자신들의 사회에서 공동선을 증진시켜 빈곤을 퇴치하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에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통치로 부와 영토를 선점한 강대국들이 강고한 진입장벽을 쌓아 놓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없는 세계를 이룩하자고 만들어 놓은 국제연합은 무력화된 지 오래이고, G7(Group of Seven,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이 사실상 지구라는 세상의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전 세계 경제의 5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소득 불평등 극단적 수준으로 커져…방치하면 파국”, 한국경제신문, 2017.12.17.
“지난 37년 동안 상위 0.1%인 700만 명의 부자가 가져간 세계의 부와 소득 증가분이 하위 50%인 38억 명에 돌아간 몫과 같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오류와 죄악을 반대하되 이를 넘어서는 선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차원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천상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오류와 죄악에 물들어 있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만큼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산이든 권력이든 지위든 쾌락이든 그렇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