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2023.9.17.) :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진리를 본 의인들, 그 숨은 이야기
오늘은 순교자 성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금년도 순교자 대축일에는 이제껏 잊혀지거나 가려진 인물들 중에서, 그분들의 생애가 현 시기 우리 교회의 사도직 현실과 전망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몇 장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상기시켜 드릴까 합니다. 공통적으로 이분들은 유학이 국교처럼 군림하던 조선 사회에서 양반 출신이거나 백정 출신이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또한 여성 지도자로서나 양반 출신 관노비로서나 백성을 대변하는 역할로서 유학의 지식과 신분 질서를 디딤돌 삼아서 천주교의 진리와 새로운 질서로 승화시킨 선조들이며, 한 마디로, 진리를 본 의인들입니다.
우선, 시복 시성이 된 순교자들의 대축일 이름부터가 그 대표적인 이름은 모두 남성과 사제로만 불리어왔습니다만, 오늘은 여성 순교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서 강완숙 골롬바를, 그리고 비록 치명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순교자 못지않게 신앙을 증거한 인물로서 정난주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이 두 여성 선조들의 생애와 신앙에 대해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선이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부당하게도 신분 차별을 제도화시키고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며 인권을 유린했던 그 엄혹한 시절에, 천민으로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후 내로라하는 양반 선비들과 교우로서 당당하게 친교를 맺고 실제로 「주교요지」를 통해 정약종에게 백성의 언어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복음화에도 기여한 천민 출신 황일광 시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성 리더십의 본보기, 강완숙 골롬바
골롬바(1761~1801)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양반 가문의 서녀(庶女)였고, 남다른 지혜와 담대함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질서가 유난히 드셌던 당시 세상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홍성의 양반인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갔으나 남편 홍지영의 줏대 없고 용렬하지 못한 성품을 보면서 절망스러웠는데, 「천주실의」를 읽으며 천주교를 알게 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먼저 남편과 가족과 친척들에게 천주교를 알렸으며 특히 그 사이가 편하지만은 않았을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에게까지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면서 그는 ‘골롬바’라는 세례명으로 정식 입교를 했고, 그의 총명함과 지도력을 눈여겨본 주 신부는 교리를 연구하고 선교하고자 조직한 명도회(明道會)라는 단체의 여회장 임무를 강 골롬바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던 어린 신앙 공동체의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으며, 대단한 말솜씨와 이치에 합당한 말로 여성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양반가의 부녀자들뿐 아니라 왕가의 여인들과 그들의 하녀들, 자신의 머슴과 하녀로 있던 이들에게까지 골고루 전교했습니다.
또한 주문모 신부를 6년간이나 숨겨준 채로 신자들이 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게 하여 신자의 수를 늘려간 결과, 1795년 당시 4천 명이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6년 후인 1781년에 1만 명까지 늘리는 선교 활동의 핵심 역할을 해냈습니다. 당시 풍습으로는 처녀들이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기도하고 공동 경제생활을 함으로써, 여성들도 자립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邪學)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치명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그를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하였습니다.
섬김의 모성 리더십, 정난주 마리아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1773~1838, 마리아)는 황사영 알렉시오와 혼인한 후 남편이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들어가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를 쓰는 동안에 「천주실의」를 부녀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후 필사하여 돌렸습니다. 황사영은 약관 16세에 초시(初試), 17세에 복시(覆試)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천재적인 실력을 인정받아서 정조 임금의 총애를 입고 출세 길이 보장된 처지였으나, 처숙인 정약용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천주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백서(帛書)에 담았습니다. 백서란 ‘비단천에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그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 알렉시오가 능지처참형을 받고 치명하자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 경한과 함께 제주도에 관노비로 유배되었습니다. 아들은 추자도에 내려놓고 자신은 제주도 대정 관아에서 모진 무시와 구박을 받은 것은 물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37년 간 살았는데, 늘그막에는 그의 인품과 교양과 학식에 감화된 주변 사람들이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며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노비 시절 갓난 아기를 맡겨 돌보게 했던 김씨 집안에서 대대손손 정난주 마리아의 묘소를 관리하며 보존해 주었기에 나중에 제주 교구에서 대정 성지로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제주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에서 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강론하였습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많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주 섬이 복음화되고 있는 기초는 최초의 신앙인으로 유배와서 관노비이면서도 양반의 품위로 섬김의 삶을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입니다.
정약종을 가르친 백정 황일광 시몬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1757~1802, 시몬)은 천민 출신이라 어린 시절을 어렵게 지냈지만,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1792년 무렵, 홍산에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통해 시몬이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 교우촌에서 그는 양반 신자들이 천민 출신인 자신을 ‘교우(敎友)’라고 부르며 형제처럼 대해 주는 데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1800년에 황일광 시몬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교우촌으로 이사했는데, 이곳에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었고 당시 정약종은 주교요지를 쓰기 위해 구상하던 중이었습니다. 황일광은 정약종과 교우로 지내면서 정약종에게 서민들의 말투와 어법 등 백성의 언어를 가르쳐줌으로써 정약종이 「주교요지」를 서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쓰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교리에 있어서는 정약종이 스승 노릇을 했으나 언어의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황일광이 스승 노릇을 했던 셈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황일광은 정약종에게 서민의 언어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있던 서민의 정서도 전달했을 것이고, 이 정서 안에는 조상 대대로 서민들이 의지해 오던 하느님 신앙도 녹아들어 있었을 것이며, 한민족의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정신 전통에 대해서는 정약종도 일가견이 있던 터이므로, 두 사람은 이 일에 의기투합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약종과 황일광의 합작으로 쓰여진 「주교요지」는 문화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서적입니다. 첫째, 이 책은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대중 교리서입니다. 1790년대 조선 사회에서 저술된 대부분의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또한 이 책은 한글로 쓰여진데다가 그 내용이 비유나 표현상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서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로 민중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바로 이 점이 황일광 시몬의 숨은 공로입니다.
「주교요지」의 또 다른 가치는 단순한 교리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선 일종의 ‘신학 서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 책은 민중이 당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 가치관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고, 인간은 죽은 후에라도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서 행한 행실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람이 죄에서 구원되었다고 가르치면서 모든 의인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불교와 유교는 모두 지배계층의 종교였고 통치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반만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피지배계층의 종교로 들어왔으며, 지배계층과는 다른 독자적인 가치관으로 그것도 평화스러운 가치관으로 백 년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치명으로 저항하면서 살아남아서 이 땅의 문명을 앞당긴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선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가 있었고, 진리를 깨달은 선비 정약종이 있었으며, 역시 진리를 깨달은 백성 황일광이 있었습니다.
황일광 시몬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굳건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천민인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교우촌에서는 양반네들이 나를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더 있음을 분명하다.” 그도 역시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눈높이에 맞춘 섬김의 리더십
우리는 강완숙 골롬바와 정난주 마리아 그리고 황일광 시몬의 생애와 신앙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섬김의 리더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강완숙 골롬바와 정난주 마리아는 약자를 보살피며 아픔을 치유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모성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황일광 시몬은, 섬김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회적 약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발휘되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주교요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평한 대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뛰어넘는 우수한 교리서요 신학서적이었지만, 황일광 시몬의 역할에 힘입어 서민의 눈높이에서 읽기 쉽고 알기 쉽게 썼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교우들에게 보급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당시 교우촌의 교우들을 천주교 교리로 정신 무장시킬 수 있었던 덕분에 박해의 모진 고문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지식인과 민중이 어떠한 연대를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이유와 목적이 우리가 사는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도 그분들이 살았던 가치가 여전히 살아있기를 바라기 때문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분들이 증거해 낸 새로운 리더십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리더십은 여성의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눈높이에 맞춘 리더십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세 분의 신앙 선조들의 삶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분들은 이 진리에 일찍이 눈을 뜬 의인들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 간 이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리더가 될 수 있으며, 리더는 사회적 약자를 비롯하여 공동체를 돌보는 섬김의 사람이어야 하고, 섬김의 리더십이 발휘되는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평화의 고귀함, 정의의 엄정함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진리에 눈을 떠야 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