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토요일(2023.11.18.) : 지혜 18,14-19,9; 루카 18,1-8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 창조 이래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이전까지 에덴 동산과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진행되었던 역사를 서사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이렇습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
그리고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모으시고자 이집트를 상대로 전격적으로 일어났던 해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씀을 의인화하여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으로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지혜 18,16; 19,6-8).
이집트에서 억압을 받으며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까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동적인 기적이 이러했습니다. 그 천 년이 넘게 흐른 뒤에 예수님께서는 지리멸렬해진 이 백성을 새로이 열두 제자 체제로 재편성하셨고,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복음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기준이자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장 닮은 존재로서 그분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뜻이고, 그 사랑을 본받아서 하느님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을 상기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를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류도 인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러 모으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형제애는 공동체라는 생활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교회의 선교활동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단호한 명령으로 말씀의 지혜가 이끄시는 역동적인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가 열리기 2백여 년 전부터 ‘교우촌’이라고 불렀던 신앙 공동체를 세워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낸 우리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한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파스카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자리도 결국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반어법적으로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것도 결국, 공동체를 통해 역동적인 기적을 이루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경과 그리고 전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향후 다가올 미래에 주님께서 일으키실 기적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가 내다보고 있는 전망은 그 당시 그리스 문명권에 흩어져 살던 히브리 디아스포라에서 바라본 것입니다만, 그리스 문명에서 발원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지난 2천 년 동안 인류를 이끌고 있는 서양 문명 전체에 대해서도 유효한 역사적 발언입니다. 마치 작은 열쇠 구멍으로 다가올 미래 현실을 엿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 예지력이 놀랍도록 정확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15) 하는 서사적 표현은, 헬레니즘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사상이 헤브라이즘이라고 불리는 유일신 종교를 만난 영향력이 지대하였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입니다.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 이성과 신앙, 개인과 공동체의 만남이 오늘날 인류 문명을 주도하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이 과연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충분히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물질 문명이라는 차원에서는 서양이 주도하고 있음이 명백하지만, 정신 문명이라는 차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서양 문명에 한때 뒤처져 있었던 동양 문명이 그리스도교에 눈을 뜨고 특히 극동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시 ‘동양’(Oriental Region)과 ‘서양’(Occidental Region)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문화권에서 꽃을 피웠기에 내려진. 그래서 다분히 그리스 중심적 구분입니다. 지중해의 동쪽에 아시아 대륙이 위치해 있어서 ‘동양’이라 불리었고, 그 서쪽에 유럽 대륙이 자리잡고 있어서 ‘서양’이라 불리어 왔을 뿐입니다. 본시 동과 서의 방위 구분이란 상대적이어서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 문화권에서 꽃을 피운 물질 문명이 그 중심축을 서진하였기에 헤브라이즘과 로마에서 만난 헬레니즘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의 게르만 문명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랬다가 지금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둔 아메리카 대륙 그 중에서도 미국 문명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추세를 미리 보여주는 선행지표(先行 指標)가 경제 현상의 활력을 나타내는 각종 통계들인데, 이에 따르면 미국과 대서양 연안의 유럽 국가들과의 교역량 규모보다 미국과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교역량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서양 국가로 자처해온 미국이 태평양 국가라고 선언하고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사정에 깊숙이 개입하려 드는가 하면,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길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유럽과 교류해온 러시아도 아시아 국가임을 선언하고 나서는 참입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이 발빠른 행보는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흐름을 반영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신 종교로 역사에 출현한 유다교와 그에 뿌리를 두고 출현한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의 맨서쪽에서 발원하였다면 우리는 그 아시아의 맨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중심축이 서진하여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한국이 위치한 극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면, 정신문화의 중심축인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온 방향은 물질문명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동진해 와서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가톨릭의 선교가 그러했습니다. 유럽과 아메리카를 포괄한 서양에서 그리스적인 그리스도교, 헬레니즘적인 헤브라이즘이 문명을 추동(推動)했다면, 한반도에서는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와 중국에서 발원한 유교가 정신토양으로 축적된 바탕 위에서 동진해 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교 복음은 서양식 그리스도교 문명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유럽 교회의 아류(亞流) 같은 경향도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경향은 프랑스를 위시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자신의 조국 교회에서 경험한 것들 중에 그래도 가장 좋은 것만을 고르고 골라서 한국 교회에 전해주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것이고, 한국 교회 본래의 정신적 토양이 서양과 다르고 불교적인 종교성에다가 유교적인 철학성이 가미되어 있어서 머지않아 그 고유한 색채가 드러날 것입니다. 서양 문명에서 습득한 합리주의적 경향 위에 불교에서 받아들인 구도적 전통과 유교에서 영향받은 윤리적 가치 존중심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만, 서양식으로는 기껏해야 9일기도의 전통으로 나타났지만 동양식으로는 백일기도의 전통이 있습니다. 더 정성을 들이고 더 끈질기게 인내하는 기도의 전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세 사물의 무상성을 깨우쳐주었고, 유교는 현세 질서의 치밀함을 추구했는데, 불교적 사유와 유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 가톨릭의 구도 전통은 내세에서 이룩될 하느님 나라를 이 현세에서부터 구현하려는 역사의식과 함께 합리주의적 사회의식과 결합된다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서양식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아울러 돌파하는 독창적 면모를 지닐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화두(話頭)를 던져주고 있습니다만, 이는 개별 신앙인들의 신앙 과제이면서 동시에 한국 가톨릭의 구도전통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공통의 신앙 과제로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불교적 사유와 유교적 사유에 각기 고유한 거룩한 전통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서양식 합리주의적 사유의 장점까지 가미한 구도적 전통과 윤리적 문화로써, 한국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한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을 돌파하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희망의 땅 한반도 한가운데로 뛰어내리실 것입니다,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주님께서 이제껏 역사에서 이루신 기적을 기억해야 하고, 또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 이루실 기적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