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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이 시대의 징표로
  • 이기우
  • 등록 2023-12-01 22: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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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금요일(2023.12.1.) : 다니 7,2ㄴ-14; 루카 21,29-33


오늘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7장에 나오는 환시는 기원 전 6세기경 바빌론 유배 시절부터 기원 전 3세기경까지 근 3백 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세력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한 눈에 본 것입니다. 이 역사는 지중해를 가리키는 듯한 ‘큰 바다’에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혼돈의 역사입니다. 이 나라들이 네 마리 짐승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악한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의 날개를 갖춘 사자로 묘사된 첫 번째 짐승은 바빌론 제국의 위세를 상징합니다. 난폭하여 주변 약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한 바빌론은 7년 동안 하느님의 벌을 받고 나서는 겸손해 져서, 독수리의 날개가 뽑히고 사람처럼 걸어 다니며 지성과 의지를 나타내는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이 시기를 경험한 유다인들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할 때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는 탑의 이름을 바벨탑이라고 지었던 사연이나 종내는 그 탑을 짓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졌다는 이야기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곰으로 묘사된 두 번째 짐승은 바빌론을 누르고 일어선 메디아 제국을 나타냅니다. 이 곰이 입 속에 갈비 3개를 물고 있었다는 표현은 메디아가 세 나라를 정복했음을 시사합니다.


머리도 날개도 네 개씩 달린 데다가 날쎈 표범처럼 생긴 세 번째 짐승은 페르시아를 빗댄 것입니다. 과연 페르시아는 사방으로 거침없이 진격하여 동방을 정복하였고, 키루스, 다리우스 1세, 아하스에로스, 아르닥싸사의 네 임금이 다스렸습니다. 키루스 치세에 유다인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앞선 세 짐승보다 더 끔찍하고 무시무시하며 쇠 이빨과 열 개의 뿔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네 번째 짐승은 그리스를 상징합니다. 쇠 이빨로 물어뜯듯이 사방 천지를 정복해가던 그리스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눈과 입을 가진 뿔이 상징하는 후계자들은 열 명이 출현하였고 그 열 개의 뿔들 사이에 나오는 또 다른 뿔은 안티오쿠스 4세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 자처하면서 그 뜻으로 ‘에피파네스’라 칭하였고 피정복민들을 그리스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 유난히 잔학하게 유다인들을 박해한 악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마카베오 항쟁도 일어나서 무수한 유다인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러한 지상의 환시에 나오는 짐승들은 천상의 환시에 나오는 심판주 하느님에 의해 통치권을 빼앗기고 심판대에 오릅니다. 흰 옷과 깨끗한 양털 같은 머리카락을 지니신 그분은 불 같이 타오로는 심판의 옥좌에 앉아 세상의 역사를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네 마리 짐승에 대한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혼돈과 짐승의 포악함이 계속되는 한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위협적인 세상의 악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나라에서 하느님께 시중을 들며 그분의 뜻을 떠받드는 이들의 삶 자체가 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 대한 환시로써 다니엘은 유다인들의 희망이던 메시아 도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시처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을 내다보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글을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적 기법의 특징은 마치 열쇠구멍으로 방 안의 광경을 들여다보듯이 예언자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먼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서 현재의 일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관찰함으로써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미래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는 데 있습니다. 대개 위기와 고난 속에 처한 믿음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려고 이 묵시문학적 기법이 쓰입니다.


오늘 복음인 루가 복음 21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되듯이 당신이 수행하신 여러 행적을 염두에 두시고 이것이 하느님 나라 도래의 결정적 징표임을 깨달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방식이 세상 현실 속에 징표를 드러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징표를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만일 이 징표를 알아보지 못하면 눈을 가리고 길을 가는 것처럼 위험할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든 교회든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독재시기를 합하여 백 년 동안 우리 겨레도 엄청난 혼돈과 무지막지한 탄압을 겪었습니다. 억압과 분단, 전쟁과 독재 그리고 가난과 빈부 양극화를 경험했습니다. 민주정권이 들어섰다가도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지금도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 영화 < 서울의 봄 > 스틸컷


친일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있고, 반공을 방패로 삼아 기득권을 누리는 친일파의 후손과 독재의 부역세력들이, 마치 다니엘이 꿈에 본 환시에 나오는 짐승들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움켜쥐고 있는 불의한 기득권 때문에 정의가 온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이 조장하는 양극화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에 맞서는 연대의 손길이 아직도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동안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의 가치에 눈을 뜨고 공동선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게 된 시민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의 징표입니다. 바야흐로 깨어나고 있는 시민들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이 시대의 징표로 주목하면서 신앙이 열어갈 새벽을 기다립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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