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2023.12.8.) : 창세 3,9-15.20; 에페 1,3-6.11-12; 루카 1,26-38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서, 공의회 이전에는 성모 무염시태(無染始胎) 대축일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교회는 무염시태의 성모 마리아를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는 안타깝고도 절절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성경에 기록될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 일어난, 매우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신자들은 구세주를 잉태하시고 낳아 기르셨으며 그분의 첫 제자가 되신 마리아에 대해서 공경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경심의 기원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분으로 하느님께서 간택하셨다면 마땅히 그에 걸맞는 품위로 세상의 죄는 물론 아담 이래의 원죄로부터도 보호를 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신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복음사가들이 목격하고 기록할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성모 마리아의 기억과 진술에서 나왔을 것이고 보면 마리아께서 잉태되실 때의 일을 마리아가 기억해서 성경에 기록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서 우러나온 신심이 성전(聖傳)이 되어 무려 천 팔백 년 동안 유지되자 성경에 맞먹는 권위를 발휘한 셈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시작된 이 성모 무염시태 신심은 고대를 거쳐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신자들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믿을 교리로 반포해 달라는 청원도 교황청에 끊이지 않고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 자문을 구한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이 신심을 교리로 인정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유명한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인간은 원죄에 물들어 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인데, 마리아에게 그 예외를 둘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신자들 사이에서 열렬히 전해 내려온다 해도 신학자들이 저마다 완강히 반대하는데 교황청이라고 해서 함부로 성모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반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천 팔백 년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에 따라서는 이 신심을 공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애초에는 동방 교회 신자들 안에서 전승되어 오던 이 신심이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중세에 서방 교회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1476년에 교황 식스토 4세는 교의적 차원에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이 축일을 로마 교회 전례력에 삽입하고자 처음으로 시도를 했으며, 그 뒤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이 축일에 8일 축제를 덧붙였는가 하면, 1708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이 축일을 대축일로 격상시켰습니다.
분위기가 이 정도로 무르익자 이를 믿을 교리로 반포해 달라는 신자들의 청원이 빗발치듯 교황청에 들어왔고,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공식 선포하였습니다.
신학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비오 9세는 교황 무류권(無謬權)을 발동하여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 회칙으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다음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여러분, 어렵사리 반포된 이 믿을 교리 내용뿐만 아니라 그 연도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1854년입니다. 이 내용은 성모 신심이 돈독했던 신자들 사이에서만 전승되어 전해져 왔을 뿐, 대다수 신자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신심이 돈독한 소녀 마리아 수비루 베르나데트(1844~1879)에게 이 교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진리로서 믿게 하기 위해서 병원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던 그곳 마사비엘 동굴에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된 샘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지금은 개천이 되어 흐르는 이 물에서 기적적인 치유를 겪은 이들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지목된 수비루 베르나데트는 이 신심이 지독히도 없는 교회 내외 인사들에게 거의 조리돌림에 가까운 고난을 받아야 했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인 1836년에 즉, 포르투갈 출신 북경 교구장의 방해를 피해 육로로 만주를 거쳐 조선에 입국하려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브리귀에르 주교가 병사하고 나서, 제2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엥베르 주교가 교황청에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북경 교구장은 조선 교구가 북경 교구의 관할을 벗어나는 것을 꺼려 하므로 북경 교구의 주보이신 요셉 성인 대신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즉 무염시태의 성모를 조선 교구의 주보 성인으로 인정해 줄 것을 청원한 것입니다.
아직 믿을 교리로 반포되기도 전인데도 이런 청원을 한 것은, 엥베르 주교가 프랑스 남부의 시골 출신으로서 무염시태 성모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황청에서는 북경 교구의 주보였던 요셉 성인과 신임 조선 교구장 엥베르 주교가 청한 무염시태 성모를 다 함께 조선 교구의 공동 주보로 승인해 주었습니다.
1836년이라면 윤지충 바오로와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지도급 신자 백 여명이 치명당하고 4백 여명이 유배를 당하여 신생 조선 천주교회가 쑥대밭이 될 지경이 된 신유박해 이후 한 세대가 겨우 지났을 무렵이니, 엥베르 주교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모진 박해를 종식시켜 주시거나, 혹시 그게 아니라면 박해를 당해 고발된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하지 말고 순교 치명하는 은혜를 입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향에서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께 빌고 싶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백년 박해가 종식되고 나서 천주교 신자들의 힘으로 명동 성당을 세우던 1898년에, 뮈텔 주교는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를 명동 성당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감사의 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엥베르 주교의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된 이 신심이 조선 천주교회로 퍼져 나갔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무염시태 성모께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연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알아야 하지요. 또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일을 가지고 믿을 교리로 반포하는 바람에 교회 일치가 더 어려워졌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탓에 이러한 일 자체에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찌 되었든 마리아께서 일찌감치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잉태되셨고, 태어난 직후 그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서 하느님께 봉헌되셨으며, 요셉과 정혼할 무렵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성령으로 구세주 예수님을 잉태하셨다가,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기르시고,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과정과 십자가 죽음까지 내내 지켜 보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까지 모두 겪으셨다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다른 어느 일보다도 중요한 구세사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무염시태의 성모를 공경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갈 다짐을 하면서 그 다짐이 성모의 전구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염시태 사건은 지극히 하느님다운 역사 개입 사건이고, 이를 무려 천 팔백 년 동안이나 숙고하며 고심하다가 믿을 교리로 반포한 가톨릭다운 식별이며, 따라서 가톨릭 신자라면 참으로 귀하게 간직해야 할 가톨릭적인 신심의 대상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