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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초
  • 이기우
  • 등록 2025-01-31 16: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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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 축일(2025.2.2.) : 말라 3,1-4; 히브 2,14-18; 루카 2,22-40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탄 후 40일이 되는 이 날,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일을 기념합니다. 또한 교회는 이 날에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각 성당의 전례와 가정의 기도에서 불을 켤 초도 이 날 축성합니다.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초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지향의 상징입니다.


메시아께서는 할례 예물로 양 대신에 산비둘기를 바칠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 오셨지만 그 부모는 율법에 따라 정해진 모든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뜻밖에도 아기를 장래의 메시아로 알아보고 자신들을 환대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여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던”(루카 2,25) 예언자였고, 한나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겨온”(루카 2,37) 예언자였습니다. 


백성 한가운데에서 이름 없는 예언자로서, 또 하느님을 섬기는 아나빔으로 살아온 시메온은 메시아를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장차 실현될 두 가지를 예언하였습니다. 즉, 메시아를 통해 이룩될 구원이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리라는 복된 예언과, 정작 메시아는 이스라엘 안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운명이며 이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겪으리라는 아픈 예언을 공표한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그는 “이제야 평화로이 떠나게”(루카 2,29) 되었음을 감사하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될 운명이라고 해도, 원숙한 지혜와 깊은 신앙심을 지닌 시메온이 아기를 메시아로 알아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는 사실은 백성 대다수가 배척했다는 비극적 사실보다도 더 귀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 하느님을 섬겨왔고 메시아를 기다려 온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고, 시메온은 한나와 더불어 그 믿음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아나빔으로 메시아를 영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아기 메시아로서 찾아오시고,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아나빔들은 이를 알아보고 영접함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를 드린 이 일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 현실과 미래 전망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묘한 섭리로 복음을 자발적으로 들여온 우리 교회의 초창기 역사는, 시메온과 한나가 예언자로서 아직 어린 갓난 아기를 메시아로 알아본 것과 같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이벽 세례자 요한이  중국에서 전래된 천주교 교리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알아본 일이 우선 그렇거니와, 이 안목에 공감하고 교회를 자생적으로 함께 세운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에게서 신앙이 생겨난 일이 또한 그러합니다. 특히 철신, 일신의 두 권씨 형제와 약전, 약종, 약용의 정씨 삼형제는 이벽이 문중박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의 주도로 모두 열 명의 선비가 신생 한국 천주교회를 위한 결사체(結社體)를 꾸렸습니다. 


이는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교회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선교 조직이었는데, 오늘날 성직자들의 위계질서나 수도자들의 공동체만큼이나 더 결속력이 강했습니다. 이 젊은 선비들은 이벽이 받은 박해를 자신들도 어김없이 받게 될 줄을 충분히 내다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통해 들어온 그리스도 신앙이 풍전등화 같이 꺼져가던 조국의 앞날을 비추어 주고 겨레의 운명도 밝게 개척할 것임을 알아보았으니, 과연 그들은 겨레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천주교는 하느님 신앙을 박해하던 조정과 유림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박해받던 신자들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게 했으나, 박해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결국 그들로 인해 국력이 쇠잔해진 조선 왕조가 일제에 의해 멸망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연이어 우리 민족은 자기 탓도 없이 국토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당하는 바람에 전 국토는 폐허가 되는 등 온 겨레의 운명이 맨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려버리려던 그들의 음모는 하느님과 대적하는 꼴이 되어서 온 겨레의 운명을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망가뜨려버리는 어리석은 악행이었던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70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경제력이나 군사력 같은 하드 파워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소프트 파워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술이나 스포츠 분야에서도 한국 젊은이들의 기개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국력 상승의 주역인 일반 국민들도 이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크게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상승세는 선한 영향력을 통해 전 세계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어서 제국주의적 패권을 추구하며 약소민족을 억누르던 다른 강대국들의 경우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2백 4십여 년 전 엄혹했던 그 시절에 우리 겨레의 앞날을 천주교를 통해 알아보았던 젊은 예언자들의 안목을 새삼 감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근간이 되는 파워는 영적인 파워였기 때문이고, 여기서 기운을 얻은 대한민국은 ‘홍익인간’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선하신 영향력이 뿌리가 되어 질적으로 다른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류 현상은 민주주의 의식에서 정점을 보였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에 어긋난 내란을 일으켰을 때, 탱크와 장갑차를 맨 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의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대응,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탄핵하고 파면하도록 연일 목소리를 낸 축제 같은 시위를 본 세계 여론은 극소수 극우주의자들이 분탕질치려 했던 한국의 민주주의를 그토록 빠르게 회복시키는 시민 의식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교우 여러분!


봉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 오늘, 우리 민족을 선택하시어 오묘한 섭리로 당신을 알게 하신 하느님께서 백년 박해 동안 신자들이 치루었던 귀한 희생을 봉헌 받으시고 그 동안의 고난으로 죗값을 다 치루게 하셨으니, 이제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이 온 민족에게는 계시의 빛이 되고 한민족은 당신 백성이 되어 다른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을 비추도록 섭리하여 주시기를 시메온과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한나와 같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아나빔들이 되게 해 주시며 또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사의 초창기부터 계시받았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을 회복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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