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대법원 청사갤러리)위헌’이라는 이름의 후퇴, 전담재판부 논쟁의 본질
수정안이 가리는 것 - 독립과 투명성의 후퇴
“위헌 소지는 없다” - 입법형성권에 대한 헌법적 진단
예규는 법이 아니다 - 신속화와 신뢰 회복의 간극
더불어민주당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위헌 논란을 줄이기 위한 수정안”으로 후퇴시키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도된 수정안의 골자는 전담재판부를 2심부터 적용하고, 전담판사 추천 과정에서 법원 외부 인사를 배제하는 방향입니다.
이 선택이 낳는 결과는 단순합니다. “내란 재판만큼은 독립적·투명하게 하자”는 취지를 약화시키고, 국민이 품어온 사법 불신을 해소하기보다 재점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논쟁의 지점에서, 황치연 홍익대 교수(전 헌법연구관)는 “위헌 소지가 없다. 국회는 법사위를 통과한 원안을 본회의에서 의결하라”고 촉구합니다.
요지는 분명합니다. 국회는 대표기관으로서 폭넓은 입법형성권을 가지며, “특별법원”이 아니라 “전문(특수)법원/전담재판부” 형태는 원칙적으로 입법재량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헌법적 진단이 지금 국면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위헌’ 프레임이 사실상 입법을 봉쇄하는 정치기술로 기능할 때, 민주주의는 중요한 사건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12월 18일)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습니다. 대법원이 내란·외환·반란죄 등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를 예규로 추진하겠다는 보도입니다. 사법부가 스스로 “전담재판부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니, 이 자체는 늦었지만 환영할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냉정해야 합니다. 예규는 법률이 아닙니다. 예규는 내부 규범으로 바뀔 수 있고, 무엇보다 “누가 구성하고 어떻게 통제하느냐”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기술적 신속화’만이 아니라 신뢰의 회복입니다. 신뢰는 속도만으로 오지 않습니다. 구조의 독립성과 절차의 투명성에서 옵니다.
천주교정의평화연대가 강조해 온 언어는 이 지점에서 날카롭게 빛납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거대한 범죄 앞에서 “중립”이라는 말로 물러서는 것은 책임 회피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100만인 양심선언’ 같은 시민참여를 통해, 내란 청산을 ‘정치의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선의 과제’로 붙드는 방식도 제안해 왔습니다.
최소한의 정의를 선택하라, 내란 재판이 회복해야 할 신뢰의 조건
왜 1심부터인가 - 정의는 출발점에서 결정된다
외부 참여와 투명성 - 사법독립을 지키는 또 하나의 장치
책임의 윤리 - 사법 신뢰 회복을 위한 마지막 질문
그렇다면 지금 “가장 좋은 해법”은 무엇인가. 저는 다음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원안대로 의결하되, ‘정의의 핵심(1심 설치·외부 감시·투명성)’은 지키고, 절차적 보완은 후속 조치로 정교하게 하라.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법, 그리고 윤리의 관점에서 동시에 성립하는 “패키지 해법”이 필요합니다.
첫째, 전담재판부는 1심부터 작동해야 합니다. 2심부터라는 설계는 ‘이미 진행 중인 1심’을 사실상 그대로 두겠다는 신호가 되기 쉽습니다. 내란의 핵심 재판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가 신뢰의 출발점인데, 출발점 자체를 비켜가면 법의 정치적 설득력은 무너집니다.
둘째, 구성의 정당성이 핵심입니다. 전담판사 추천·선정 과정에서 법원 내부 논리만으로 완결시키면, 국민이 체감하는 구조는 “우리가 우리를 뽑는다”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 인사 참여는 사법독립을 침해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사법부 내부 서열문화·인사권력의 압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황치연 교수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셋째, 절차의 투명성을 법에 못 박아야 합니다. 배당 원칙, 재판 진행 원칙, 기록·공개 원칙(속기·영상기록 등), 이해충돌 회피 기준이 공개될 때, 사람들은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절차는 공정했다”는 합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규로는 부족합니다. 법률로 못 박아야 “정권이 바뀌어도, 대법원장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넷째, 민주당이 정말로 “위헌 시비”를 우려한다면, 핵심을 깎는 수정이 아니라 ‘절차적 가드레일’을 더하는 방식으로 해소해야 합니다. 예컨대 “진행 중 사건의 이관” 문제는 ‘전면 배제’가 아니라 이관심사 절차(방어권, 재판의 연속성, 증거조사의 상태 등을 종합 고려)를 법에 두면 됩니다. “원칙은 1심 전담, 다만 무리한 혼선을 막기 위한 심사절차”라는 설계는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법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법의 책임’ 문제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평화연대가 말하는 분노는 복수의 감정이 아니라 책임의 윤리입니다. “법왜곡죄/판결조작 처벌” 같은 논의가 등장하는 이유도, 판결이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서 멀어질 때 그것이 반복적으로 방치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반드시 한 가지 원칙이 필요합니다. 사법독립을 훼손하지 않도록, 고의성과 중대성을 엄격히 한정한 ‘고위험·고문턱’ 책임 규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판사 겁주기”가 아니라 “사법 신뢰 회복”이 됩니다.
정리하면, 오늘의 해법은 ‘수정안으로 논란을 덮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란의 핵심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원안 의결은 정치적 고집이 아니라 헌법이 허용하는 대표기관의 결단이며(황치연 교수의 지적처럼), 동시에 교회가 말해 온 공동선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최대공약수”가 아니라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정의를 최소화하면, 남는 것은 절차의 껍데기뿐입니다. 내란을 단죄하는 일은 정파의 이벤트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민주주의를 믿을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성사(聖事)에 가까운 공적 행위입니다. 그 자리에 ‘머뭇거림’이 들어서면, 훗날 우리는 또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