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MBC 영상 갈무리)촛불·화해·밀알로 풀어낸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
14일 오전 (이탈리아 현지시간) 로마의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특별미사’가 봉헌됐다.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이 대성전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미사에 참석해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이어지고, 세계의 연대가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굳건하게 만드는 선순환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 대통령이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주제로 한 미사에 참석하고 기념연설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천주교 250년의 신앙사 안에서도 상징성이 큰 장면으로 기록될 만하다.
평화와 연대를 향한 유럽 순방
이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은 6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흘간 이어진다. 벨기에와 유럽연합 방문, 이탈리아 국빈 방문에 이어 14일과 15일에는 교황청 공식 방문 일정이 마련됐다.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 참석이 이번 순방의 외교적 정점이라면, 바티칸 일정은 그 정신적·상징적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통령 부부는 10일 밤 로마 피우미치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측에서는 김준구 주이탈리아대사 부부와 신형식 주교황청대사 부부가 이들을 맞이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조르자 멜로니 총리와 잇달아 회담했고, 피렌체 방문 일정을 소화한 뒤 14일 바티칸으로 향했다.
이날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주례하는 특별미사가 한국어로 거행됐다. 미사는 바티칸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어로 생중계됐다. 이 대통령은 미사 후 기념연설을 하고, 각지에서 모인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만났다. 15일에는 사도궁에서 레오 14세 교황을 단독 알현하고,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 추기경과도 면담할 예정이다.
▲ (사진출처=청와대)정치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와 만날 때
이 대통령의 연설은 국제정세에 대한 진단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시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환기하고, 6·15 남북공동선언 26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흐름으로 전개됐다. 이어 “갈등에는 화해를, 불신에는 신뢰를, 분열에는 연대를”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 통합의 방향을 제시했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와 “한 알의 밀알”이라는 표현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 가운데 특히 가톨릭 신앙의 언어와 깊이 맞닿아 있는 세 대목이 눈에 띈다.
첫째는 “총과 칼이 아닌 촛불로, 폭력이 아닌 평화로, 냉소가 아닌 연대로 짙은 어둠을 밝혀왔다”는 대목이다. 촛불은 한국 현대사에서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가톨릭 전례 안에서는 부활의 빛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부활 성야 미사는 어둠 속에서 파스카 촛불을 밝히며 시작된다. 하나의 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 빛이 다시 공동체 전체로 번져 나간다. 이 대통령의 표현은 한국 시민의 평화적 저항을 신앙의 빛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게 한다.
둘째는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이어지고, 세계의 연대가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굳건하게 만드는 선순환”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단지 남북관계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세계 평화와 연결된 과제로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평화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를 쌓고, 함께 책임지는 관계 속에서 자란다. 그런 점에서 이 표현은 외교적 언어이면서 동시에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해온 공동선과 연대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셋째는 “갈등이 있는 곳에는 화해를, 불신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분열이 있는 곳에는 연대를 더하겠다”는 대목이다. 이 문장은 널리 알려진 ‘평화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이라는 기도의 구조와 닮아 있다. 대통령의 연설 속에서 이 기도의 언어는 종교적 고백을 넘어, 정치와 외교가 지향해야 할 태도로 번역된다.
“한 알의 밀알”에 담긴 평화의 신학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오늘 함께 봉헌하는 우리의 기도가 온 세상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한 알의 복된 밀알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
‘밀알’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떠올리게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밀알은 희생과 봉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의 상징이다.
특히 대통령이 사용한 “봉헌”이라는 말도 주목할 만하다. 미사 안에서 봉헌은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는 전례의 핵심 순간이다. 따라서 “함께 봉헌하는 우리의 기도”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미사에 참여한 공동체의 기도가 세상의 평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전례적 언어로 들린다.
▲ (사진 = MBC 영상 갈무리)왜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인가
이번 미사가 봉헌된 장소 역시 상징적이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은 로마의 4대 교황 대성전 가운데 하나로,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중앙 제대 아래에는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오랫동안 로마 순례의 중요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
무엇보다 이 대성전의 이름에는 ‘성 밖’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로마 성벽 바깥, 곧 제국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순교한 사도의 자리에 세워진 성전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그 경계 밖에서 복음을 증언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분단과 대결의 긴 시간을 살아온 한반도의 현실을 떠올릴 때, ‘성 밖’이라는 장소성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평화는 언제나 중심의 언어만으로 오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리, 밀려난 자리, 갈라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한국 천주교 신앙 역시 권력의 보호 아래서가 아니라 박해받는 평신도 공동체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은 한반도 평화를 말하기에 매우 상징적인 장소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코린토 1서에서 씨앗과 부활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대가 뿌리는 씨앗도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죽음을 통과한 생명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낸다. 이 대통령이 사도 바오로의 무덤 앞에서 ‘밀알’의 언어로 한반도 평화를 말한 장면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번 연설은 정치 지도자의 외교 일정 속 발언이었지만, 그 안에는 가톨릭 신앙의 오랜 언어들이 조심스럽게 배어 있었다. 촛불, 화해, 신뢰, 연대, 봉헌, 밀알. 이 단어들은 한반도 평화를 단순한 안보 전략이나 외교 과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영적이고 공동체적인 과제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