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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가오리니
  • 이기우
  • 등록 2026-07-05 17:18:03
  • 수정 2026-07-05 17: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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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177주년을 맞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석상이 바티칸 대성전 안에 세워졌다. (2023.7.5.) (사진제공 = 이기우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2026.07.05)

: 2역대 24,18-22; 로마 5,1-5; 마태 10,17-22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전례가 생겨난 경위가 이러합니다. 7월 5일은 1821년에 태어나 스물다섯의 나이로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치명한 김대건 신부가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른 날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날을 대축일로 지정했었던 이유는, 박해 받던 19세기에 꼬박 백 년 동안 온갖 수모를 당하며 죽임으로 내몰리던 한국교회 순교자들을 대표하여 첫 사제가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으니, 박해의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한 기쁨을 전 교우가 나누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에 첫 사제 김대건을 비롯한 순교 복자 103위가 성인품에 오른 데다가 2014년에는 이들보다 앞서 치명하신 124위 순교선조들까지 복자품에 올랐으니, 성인품과 복자품에 오르신 분들을 포함해 모든 순교선조들을 9월 20일에 순교자 대축일로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김대건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 오늘,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기리는 신심미사로만 지내게 된 것입니다. 마침 오늘이 연중 제14주일이어서, 평일 신심 미사로서만 소박하게 봉헌해 오던 예년과는 달리 장엄하게 드리는 주일 미사로 봉헌합니다.


김대건은 충청도 당진에 있는 솔뫼에서 태어났으나 박해를 피해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따라서 경기도 용인 은이 교우촌으로 피신하여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교우촌들을 순방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십 년 동안 준비한 끝에 1845년에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살던 은이 마을로 돌아가 반년 동안 머물면서 교우촌에서 숨어 지내는 신자들을 찾아 사목하다가, 후속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를 개척할 길을 찾으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았습니다. 대륙을 돌아가야 하는 멀고 위험한 육로 대신 가깝고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뱃길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서해로 나갔다가 연평도 근해에서 포졸을 만나 불심검문을 받았는데, 짐 보따리에서 천주교 성물이 나오는 바람에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는 바람에 현장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년 가까이 의금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회유와 고문을 당한 끝에 1846년 9월 16일에 반역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 새남터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사제가 되어 불과 일 년 만에 스물여섯 살 나이로 치명한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해 경기도 미리내에 안장되어 신자들의 기도로 공경을 받았는데, 그 결과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문근 신부가 곡을 쓰고 최민순 신부가 가사를 붙인 287번 성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노래’에는 젊은 나이에 치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했던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가 한 편의 시로 녹아 있습니다. 노래에 담긴 시어가 더욱 정갈하고 서사적인 데다가 곡조도 그의 일생에 걸맞게 아름답고 장중합니다.


1.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이렇게 시작되는 1절은 전반적으로 조선에 복음 진리가 들어오기까지 한민족이 겪었던 정신적 상황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서라벌’은 새벌의 옛말로서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해가 뜨는 동방으로 향하다가 찾아낸 새 땅을 뜻하고, ‘연꽃’은 진리를 뜻하는 불교의 상징이며, ‘선비네 흰 옷자락’은 진리를 숭상하던 유교 선비를 상징하는데, ‘무궁화’는 영원한 진리를 품은 천주교를 상징합니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해 뜨는 동쪽을 찾아 이 땅에 자리를 잡고 하느님과 진리를 빛과 밝음으로 섬기는 높은 정신풍토를 조성하고 있다가 통일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의 시대에는 유교를 우리 민족의 대표적 되는 종교로 삼아 왔었는데, 연꽃이 이울고 선비네 흰 옷자락이 어둠에 짙어 가듯이 불교와 유교의 세가 기울어질 무렵 천주교가 한민족의 정신을 이끌어 줄 진리의 빛으로서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억눌리고 쌓인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요하던 민심이 이반되던 그 시절에 참된 진리를 목말라 하던 선비들은 천주교를 들여와 진리의 빛을 겨레에게 비추임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고, 김대건 신부는 그 서광과 기대를 한 몸에 담뿍 안고서 피어난, ‘한 떨기 무궁화’ 같은 존재였습니다.


2.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 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이렇게 이어지는 2절은 교황청에서 동양 전교를 위해 설립한 파리 외방 전교회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에서 십여 년 동안 김대건 신부가 어렵사리 서양 언어와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는 이 땅의 역사에서 서양 학문을 처음으로 배운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도무지 어두웠던 조선의 조정과 주자학자 유림들은 진리는 물론 인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실학을 연구하다가 서학에서 진리를 찾은 선비들이 복음을 들여온 길이 동지사 길이었는데, 동지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던 그 당시에 동지사(冬至使)란 새 해를 맞이하여 한양과 연경 사이를 왕래하던 사신이었습니다. 중국 장춘에서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도 이 길을 통해 일시 귀국할 수 있었으나 외국 선교사들을 동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는 외국인들에게 국경을 닫아 걸었던 시절이었기에 겨레의 잠을 깨우려던 그의 꿈은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해지는 만리장성 돌베개 삼아 자고 숭가리 언저리에 고달픈 몸이어도 황해의 노도엔들 꺾일 줄 있을소냐 장할 쏜 그 뜻이야 싱싱히 살았어라


계속되는 3절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부제 시절에 만주를 통해 압록강물이 얼어붙는 한겨울에 입국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만리장성이 보이는 만주 벌판이나 송화강 언저리에서 고달프게 방황하던 시절 돌베개에서 선잠을 자면서 배회해야 했었습니다. 그 당시 만주인들은 송화강을 ‘숭가리 올라’라고 불렀는데, ‘숭가리’는 은하수를 뜻합니다. 육로를 통한 입국 시도가 실패하자 그 다음번에는 바다를 통해 입국을 시도하여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나서는 허술한 돛단배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부터 황해를 통해 표류하며 제주도 용수에 표착했다가 충청도 나바위에 극적으로 입국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4. 한강수 굽이굽이 노돌이 복되도다 열두 칼 서슬 아래 조찰히 흘리신 피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4절은 치명하던 장면을 그렸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살던 경기도 은이 마을에서 교우들과 함께 하는 첫 미사를 드리고 6개월 가량 숨은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하는 등 짧은 사제생활과 사목활동을 하던 중, 조선에 선교하러 파견되는 후속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확보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황해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6개월 가량 문초를 받고 회유와 고문을 당한 후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백사장이었던 새남터의 건너편이 노량진인데, 그 옛 지명이 ‘노돌이’입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를 참수하던 당시 휘광이들은 일부러 잘 갈아놓지 않은 무딘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열두 번째에 가서야 목이 잘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조정의 박해가 잔인했는지 그리고 김 신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요? 이 장면을 작사가 최민순 신부는 ‘조찰히’ 흘리신 피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깨끗하고 아담하다’는 뜻입니다.


5. 가신 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싸우며 끊임없이 이기며 가오리니 김대건 수선탁덕 양떼를 돌보소서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5절은 후대의 교우들이 김대건 신부의 영웅적인 순교에 힘을 얻어서 조국의 복음화에 힘써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수선탁덕(首先鐸德)이란 첫 번째 사제를 뜻하는 옛 중국 천주교회 용어인데, 천상에 계신 김대건 수선탁덕께 전구를 청하여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사실상 우리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민족 복음화의 지향입니다. 그러자면 백년 박해를 이겨낸 신앙을 첫 번째 밑거름으로 삼고, 반 세기 가량 이어진 식민통치에 항거하던 독립운동의 의기를 두 번째 밑거름으로 삼으며, 해방 후 분단 상태에서 들이닥친 독재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양심을 세 번째 밑거름으로 삼아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이 화해한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복음의 진리를 꽃 피워달라는 당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가 이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기까지 밑거름이 되어 준 인물들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사제 성소의 은인으로서 조선에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모방 신부는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발탁하였습니다. 그 다음, 선교사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주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교수 신부들이 있습니다. 김 신부가 남긴 25통의 서한들 중 대부분은 마카오와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과 언어와 학문을 가르쳐 준 교수 신부들에게 존경의 안부를 전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보고하느라 보낸 것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신앙의 은인으로서 조선 교회를 세운 창립 선조들을 들어야 합니다. 본시 김 신부의 집안은 충청도에서 4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가문이었고, 그 증조부되는 김진후 비오가 내포의 사도로 불리우는 이존창 루도비꼬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존창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었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으므로, 김 신부의 신앙은 초기 신앙 선조들에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가에는 김대건 신부의 파란만장했던 일대기뿐만 아니라 그가 첫 사제로서 순교하기까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조선 천주교회의 슬프면서도 빛나는 역사도 녹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듯 험난한 역사적 상황에서도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 덕분에 민족사 안에 신앙을 꽃피웠습니다. 이제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서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야 할 때입니다. 성가 마지막 절 마지막 가사인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 주소서'라는 가사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한국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기리는 오늘의 이 신심미사에는 민족 복음화를 지향하는 이토록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동문수학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된 다음에 전국 189군데 심산유곡에 세워진 교우촌 신자들을 위해 열두 해 동안 사목했던, ‘길 위의 순교자’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 기도하는 뜻도 바로 민족 복음화입니다.




[필진정보]
이기우(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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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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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cmaca12026-07-05 18:24:51

    https://blog.naver.com/macmaca/224090602113

  • 프로필이미지
    macmaca12026-07-05 18:23:56

    국사 성균관자격 宮성균관대.*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세워진 서강대는, 세계사의 교황제도 반영, 국제관습법상 예수회의 가톨릭계 귀족대학으로, 양반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상위규범인 국제법,한국사, 헌법, 세계사,주권기준이라 변하지 않음. 5,000만 한국인 뒤, 주권.자격.학벌없이, 성씨없는 일본 점쇠(요시히토,히로히토등)가 세운, 마당쇠.개똥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그뒤 서울대 미만 전국 각지역 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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