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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22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8-20 11:46:25
  • 수정 2016-03-23 16: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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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21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여러분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여러분은 웃게 될 것입니다. 22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여러분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23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으시오. 보시오, 여러분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습니다.”

24그러나 불행하여라, 여러분 부유한 사람들! 여러분은 이미 위로를 받았습니다. 25불행하여라, 여러분 지금 배부른 사람들! 여러분은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여러분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26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좋게 말하면,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습니다.”(루가복음 6,20-26)



예수가 산에서 내려와 들판에서 한 선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달리 루가의 평지선언이라 불리는 단락이다. 행복선언뿐 아니라 불행선언이 뒤따르는 점이 특이하다. 행복선언 네 번에 불행선언 네 번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는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불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수의 행복선언만 기억하고 불행선언을 망각하면 안 된다. 예수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특정인을 향한 비밀 교리가 아니다. 벌판에서 만방에 역사에 선언한 예수의 공개적 가르침이다.


행복선언류의 가르침은 그리스나 이집트에도 이미 있었다. 스승의 자세는 앉는 것이고 예언자의 자세는 서 있는 것이다. 예수는 서서 이 선언을 한 것 같다. makarios는 축복의 뜻이다.(창세기 30,13; 시편 1,1; 요한묵시록 14,13) 행복선언의 첫째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루가에서 ptokos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나라가 그들 것이니 행복하다.


부자들에게 하느님나라는 주어지지 않는다. 부자들이 가진 것은 돈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나라를 가졌다. 그러니 누가 더 행복할까.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다. 자본주의 논리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예수는 부자들을 축복한 적이 전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무시당했지만, 유다 문화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다.(욥기 29,16; 시편 37,11; 이사야 25,4) 예언자는 하느님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졌다.(이사야 61,1) 공동성서에서(구약) 가난은 하느님의 처벌이라는 해석에서하느님의 보호로 뜻이 차츰 변하였다. 셀레우코스 시대에 가난과 영성을 연결하는 풍조가 자리 잡았다.(시편38(39), 18; 68(69), 30-34) 신약성서에서 야고보 편지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야고보 1,9; 2,5; 5,1-6)


행복이 약속된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로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불행이 약속된 부자들의 대표로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은 슬퍼할 이유가 있다.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기뻐할 이유가 있다. 성서는 우리 상식과 가치 기준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다. 돈으로 천국을 어떻게 사겠는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은 거짓이요 사기다. 예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루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모순되는 뜻은 아니다. 루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좀 더 원초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묘하고 복잡한 해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참뜻을 흐리는 온갖 시도는 교회 역사에 아주 많았다.


루가는 돈의 위험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루가 16,9-13; 사도행전 2,44-45; 4,32; 5,1-11) 부자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이 함께 있었던 루가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루가의 모습은 오늘 그리스도교에게 중요한 교훈이다. 루가는 부자 신자도 편들고 가난한 신자도 편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


부자도 편들고 가난한 사람도 편드는 짓은 예수와 아무 관계없는 일이다. 부자를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은 악마가 하는 짓이다. 오늘 그리스도교에 예수를 버리고 악마를 따르는 종교인들이 적지 않다. 부자나 권력자에게 비굴하게 아부하는 종교인은 종교인도 못되었지만 아직 인간도 못되었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가난해서 문제가 아니라 부자여서 문제다. 가난한 교회는 망하지 않지만 부자 교회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이다.


교회가 부자를 편들면, 부자는 교회에 남고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도 모두 교회에 남는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부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교회는 그런 부자 신자들을 붙잡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부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예수를 따랐던 부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며 말이다.(루가 8,2; 19,10; 23,40-53; 사도행전 8,27; 9,36; 10,2; 16,14)


오늘 단락에 얽힌 여러 성서주석학적 논의보다 나를 더 사색에 잠기게 만든 것은 루가복음 주석에서 세계적으로 존중받는 성서학자 Bovon의 고백이었다. 안락하게 사는 성서학자인 주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을 자신이 어떻게 감히 해석하려 들겠느냐는 것이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자신은 그저 경청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겸손한 고백인가. Bovon의 말에 공감하며 나도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가난하게 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모르는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어디 성서학자나 신학자에게만 해당될까. 그리스도교가 스스로를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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