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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94 : 종교인과 가난한 여인
  • 김근수
  • 등록 2017-10-31 12: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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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듣고 있는 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은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47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만은 남에게 보이려고 오래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1 어느 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와서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2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4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입니다.”(루카 20,45-47, 21,1-4) 



45-47절에서 루카는 마르코 12,37-40을 참조했다. 45절에서 모든 사람과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함께 듣고 있다. 예수는 그러나 제자들에게 집중해서 말한다. 제자들이 똑바로 들으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율법학자들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처럼 잘못 행동하지 않을까 초대교회는 벌써 염려했다. 루카는 율법학자들을 복수명사로 쓰면서 모든 율법학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모범적인 율법학자도 분명 있었지만 말이다.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의 행동과 처신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시민들과 예루살렘 지배층을 떼어놓으려는 루카의 생각이 보인다. 루카는 예루살렘 시민들과 예루살렘 지배층이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여 왔다.(루카 19,47; 20,6; 21,38) 성서에서 우리 독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과 지배층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율법학자는 우리 시대로 보면 신학자들이다. 예수는 루카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있던 율법학자 그룹을 비판한다.(Wolter, 662) 복음서에서 예수는 종교인과 신학자를 여러 차례 비판하였지만 평신도들에게 그런 적은 없었다. 예수는 부자와 지배층과 종교인을 비판했지만 백성과 가난한 사람들과 신도들을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다. 

  

율법학자들의 대표적인 일탈 행위 여섯 가지가 자세히 소개되었다. 크게 보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윗사람처럼 행세하는 태도, 신도의 돈을 갈취하는 행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이다. 교만, 돈 욕심, 위선을 종교인의 3대 악이라고 이름지어도 될까. 율법학자들은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기를 좋아한다. 율법학자들이 입고 다녔던 값비싼 예복을 가리키고 있다. 비싼 예복을 입어야 품위가 있어 보이는가. 당시 지식인들이 즐겨 입고 다니던 옷이 따로 있었다.(Wolter, 662) 예수는 율법학자들이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들도 그런 관습을 알고 있었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우리 시대 종교인과 신학자들의 대표적인 일탈 행위는 무엇일까. 목사와 신부들의 대표적인 일탈 행위 여섯 가지는 무엇일까. 율법학자들의 대표적인 일탈 행위 여섯 가지와 우리 시대 목사와 신부들의 대표적인 일탈 행위 여섯 가지는 얼마나 다를까. 종류와 규모와 은밀함에서 차이는 있을 것 같다. 윗사람처럼 행세하고, 신도의 돈을 갈취하며,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은 우리 시대 종교인과 신학자들과 관계없는 내용인가. 주교와 목사와 신부들은 46절과 47절을 자주 읽고 기억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종교인들이 가난한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각종 헌금에 신자들은 고통스럽다. 돈 없으면 교회 못 다닌다는 말, 가난한 사람은 성당 못 다닌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다. 종교인들이 부자와 권력자와 즐겨 어울리면 될까.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가톨릭 신부들은 또 무언가.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데 십자가는 어디 두고 왜 골프채를 잡고 있는가. 골프하지 않는 신부가 “나는 골프 안 합니다”라고 항의하면 안 된다. 모든 율법학자들이 다 나쁘게 살지는 않았지만 다 예수에게 싸잡아서 비판받았다. 많은 신부들이 골프장 출입하는 현실은 주교들이 책임져야 한다. 


예수 생애에서 특이한 사실중 하나는 예수가 종교인들과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는 것이다. 갈릴래아 시절 예수가 유다교 사제들과 교류한 기록은 없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지배층 사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주요 적대자였다. 예수가 사제들과 신학자들에게 종교적으로 영향받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예수의 분별력은 놀랍다. 예수는 종교인들의 역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의 처신을 비판했다. 종교인이 필요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종교인들이 똑바로 살라는 말이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은, 우리 시대로 바꾸어 말하면, 종교인들을 조심하라, 사제들을 조심하라, 신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신부와 목사들을 조심하라. 수녀들을 조심하라. 종교인들은, 주교와 목사와 신부들은 46절과 47절을 매일 읽으시라. 신도들은 46절과 47절을 잊지 마시라. 종교인의 말과 가르침보다 종교인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세히 보시라. 종교의 가르침보다 종교인이 평소 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있는지 보시라. 


성직자를 욕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성당에서 돌아다닌다. 주의 종을 비판하면 벌 받는다는 말이 개신교에 있다. 쓸데없는 말이다. 목사만 주의 종이라니? 만인사제설을 주장하고 생겨난 개신교에서 말이다. 대통령은 욕하기 쉬워도 주교를 비판하기는 어려운가. 사회개혁을 외치는 성직자중에 자기 주교를 비판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교회 적폐에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다무는 성직자들이 많다. 그런 처신을 하면서 어떻게 사회 적폐를 없애자고 감히 설교할 수 있을까. 그런 성직자들의 언행을 누가 신뢰할까. 


오늘 어느 신자가 예수처럼 종교인을 비판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종교를 파괴하는 사람이란 비난을 듣지 않을까. 성직자를 우습게 아는 평신도라는 핀잔을 들을까. 예수의 종교인 비판은 유다교 재판에서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예수를 죽이려 했던 유다교 지배층은 예수의 종교인 비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비판받지 않는 종교인은 부패하기 쉽다. 예수는 교만, 돈 욕심, 위선을 종교인의 3대 악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시대 신학자는 대부분 성직자다. 평신도 신학자는 한국에서 더구나 드물다. 유다교에서 율법학자, 랍비, 사제는 각기 다른 역할을 가졌다. 율법학자와 랍비는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였다. 율법학자와 랍비는 사람들에게 성서와 신학을 가르쳤지만 예배에서 의식을 집전하진 않았다. 사제는 의식을 집전했지만 성서와 신학을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유다교의 율법학자, 랍비, 사제는 목사와 신부로 통합되어 버렸다. 



역사에서 평신도 신학자는 가끔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 평신도 신학자는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점점 늘기 시작했다. 여성신학자는 20세기에 사실상 처음 등장한 셈이다. 평신도 신학자와 여성신학자는 여러 이유로 갈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평신도 신학자와 여성신학자가 더 늘어나고 교회 안팎에서 활약이 더 커질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교의 성직자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가 조금씩 줄어질 것이다. 지금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큰 골칫거리다. 


1-4절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대해 최근 두 가지 해석이 나왔다. 과부와 율법학자들을 대조한다는 의견과 과부와 부자들을 대조한다는 의견이다. 문맥상 어느 해석을 택한다 하더라도 예수 가르침은 분명하다. 부자나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이다. 부자는 재산의 일부를 바쳤지만 과부는 삶 전체를 바쳤다. 욕먹어도 부자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예수 말이 들릴까. 욕먹어도 율법학자들처럼 거들먹거리고 싶은 종교인들에게 예수 말이 귀에 들리기는 할까.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서 곧바로 율법학자들과 대조되는 과부의 모습이 소개된다.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말고 과부처럼 살라는 말이다. 율법학자들은 천국에 가기 어렵지만 과부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종교인들은 천국에 가기 어렵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 가기를 포기한 종교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종교인들이 구원의 희망을 포기하고 산다면 말이 되는가. 그러려면 왜 종교인이 되었단 말인가.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가난한ptoke 대신 극빈의perikros 형용사를 썼다. 과부의 처절한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통 가난한 삶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극빈층 사람이란 뜻이다. 마르코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많은 루카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좀더 세심하게 구분한 것이다. 루카는 왜 복음을 썼던가. 부자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이 함께 있던 루카공동체에서 예수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것이 루카의 집필 의도였다. 루카는 부자 신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신자들을 편들었다. 그것이 루카복음의 결론이다. 


부자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이 교회에 성당에 함께 있다면, 목사 신부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어떻게 설교해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이런 곤란한 문제에 루카는 명쾌하게 답을 주고 있다. 부자 신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신자들을 편들어라. 목사 신부들은, 교회는, 평신도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부자 신자들도 달래고 가난한 신자들도 달래고 있지 않은가. 교묘한 줄타기에 중립에 균형에 온갖 묘수가 동원되고 있지 않는가. 신자 줄어들까 헌금 줄어들까 그것만 고민하고 있지는 않는가. 루카복음을 무시하고 헌금만 신경쓰고 있지 않은가. 


부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는 예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가난한 과부를 사랑하는 예수를 놓쳐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부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했기 때문에 과부에 대한 사랑이 샘솟은 것이 아니다. 가난한 과부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부자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 것이다. 분노가 저절로 사랑을 낳지는 않는다. 사랑이 분노를 낳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교회에 대한 사랑을 낳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 때문에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비판이 사랑을 낳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비판을 낳는다. 예언자들은 종교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유다교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유다교를 심하게 비판한 것이다. 유다교 신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교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루카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에만 가득 찬 사람은 아니었다. 인간 구원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만 달려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아니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에, 십자가 죽음과 부활보다 먼저 역사의 예수 삶에 관심을 두었다. “갈릴래아에서 십자가 직전까지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처신했는가 자세히 보자. 그런 예수를 따르자.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는 것이 인간 구원의 길이다.” 이 말을 루카는 온세상에 외치고 싶었다. 루카는 마르코를 존중했지만 마르코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루카는 바오로를 이해했지만 바오로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루카에게 예수는 가난한 예수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해방자 예수다. 루카는 예수처럼 해방신학자다. 


신약성서에 바오로 편지들만 남아있고 4복음서는 없다고 상상해보자. 예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4복음서에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남아있고 십자가 이전 이야기는 없다고 상상해보자. 우리가 예수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집중하고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잊으면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를 절반만 아는 일이다. 예수 역사는 십자가에서 부활까지 사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를 제대로 알자. 예수 역사 전체를 알지 못하면 아직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성서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 4복음서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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