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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93 :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가?
  • 김근수
  • 등록 2017-10-24 10:49:51
  • 수정 2017-10-24 10: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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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42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이렇게 읊지 않았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44 다윗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습니까?”(루카 20,41-44)



마르코가 예수를 새롭게 해석한 신학자라면, 루카는 마르코를 새롭게 해석한 신학자다. 예수의 논쟁은 주제를 바꾸어 계속된다. 앞 단락 20, 26에서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트집 잡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의 답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20, 40에서 감히 그 이상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예수가 사람들에게 오히려 질문 시작한다. 41-44절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를 주제로 질문한다. 근거는 시편 110장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예레미아 23,5; 에제키엘 34,23; 37,24)이라는 여론을 먼저 인용한 후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12,35-37에서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말했다는 부분을 루카는 빼버렸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마르코 12, 35)를 루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으로 본문 41절에서 바꾸어버렸다. 위험을 무릅쓰고서 새롭게 말하려 시도하는 루카다. 루카의 신학적 자유가 부럽고 놀랍다.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율법학자들은 메시아의 다윗 혈통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바리사이파에 속하지 않는 율법학자들도 물론 있었다. 바리사이파에서만 신학자, 즉 율법학자가 배출된 것은 아니었다.


41절 질문을 우리가 잘 보아야 한다. 루카는 다윗의 예언자적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시편 110장이 성경에 포함된 사실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사람들이 왜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냐고 묻지 않았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물은 것이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루카 1,27; 18,38; 로마 1,3) 그런데 마르코나 마태오와 다르게 사람들의 반응이나 답변이 없다.(마르코 12,35-37) 답변하지 못했다는 설명(마태 22,46)도 없다. 예수의 질문만 있다. 질문의 출처도 의도도 아리송하다. 참 이상하다. 이런 대화나 논쟁은 루카에 여기밖에 없다. 질문보다 차라리 예수의 독백으로 보아야 하는가. 


41절에서 그들은 앞 단락 39절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41절에서 사람들이 누구라고 말한다는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질문을 뜻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겠다. 예수의 질문이 율법학자들에게 반박당할 경우를 예상해서 루카가 그렇게 꾸며낸 말일 수도 있다.(요한 8,33; 12,34; 고린토전서 15,12)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다윗 가문 출신 인물을 사람들은 기다렸다.(사무엘하 7,12-16; 이사야 9,5-6; 11,1-10)


시편 110장(70인역 109장)은 신약성서에 가장 많이 인용된 공동성서(구약성서) 구절이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시편 110장을 인용하면, 하느님과 메시아 예수를 옆에 나란히 놓을 수가 있다.(고린토전서 8,6) 2.그리스도 예수를 하느님 오른 편에 앉힐 수 있다. 그러면 예수 부활을 주님으로 드높임이라고 해설하고 예수의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다.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유다교 율법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초대교회는 예수 부활과 드높임을 언급하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시편 110장이 예수 부활, 드높임, 메시아를 동시에 변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시편 110장은 예수 부활, 드높임, 메시아를 동시에 연결해 주었다. 유다교가 시편 110장을 그리스도교처럼 해석한 것은 아니다. 고대 유다교에서 시편 110장이 메시아를 뜻하였는지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시편 저자로 여겨지는 다윗이 시편 110장에서 아들이 아니라 주님을 노래하고 있다. 원래 임금의 취임식에 부르던 노래였다.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시편 110장을 합창한다고 상상해보자. 주어는 하느님이다. 44절에서 어떤 사람의 주인이 그 사람의 아들이 되거나 반대 경우일 수는 없겠다. 메시아가 어떻게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 되고 다윗의 아들이 된단 말인가. 예수가 동시에 다윗의 아들이요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다. 


유다인들이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초대교회에 항의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수가 나자렛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수 사후 60여년 이후에 써진 요한복음에도 나온다. 그만큼 오래 끈질기게 논란된 주제였다. 메시아는 유다 지방에서 나와야 한다(요한 7,40-44)고 했는데, 예수는 유다 출신이 아니라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를 다윗 자손으로 설명하였다. 예수 탄생 이야기(마태오 1-2장; 루카복음 1-2장), 예수 족보(마태오 1,1-17; 루카 3,23-38)가 바로 그것이다. 사도행전도 이 논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예언자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 사랑받는 왕이고 그 자손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다.(사도행전 7,46; 13,22) 



예수는 다윗의 주인이요 주님이다. 이것이 루카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루카복음 1,26-38을 기억하는 사람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메시아요 주님인 예수는 다윗의 아들이다. 하느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탄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수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것이 이상하진 않겠다. 그들은 아직 루카복음을 읽어본 적이 없다. 루카복음은 그 후 약 50여년 후에 출판되었다. 그들은 루카 1-2장에 나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아직 모르고 있다. 루카복음을 읽은 사람만이 예수의 질문에 답할 수 있겠다. 


예수가 정말로 시편 110장의 해석을 두고 고민했는지, 시편 110장을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고린토전서 15,25; 에페소 1,20; 골로사이 3,1)했는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되고 있다. 당시 널리 퍼졌던 메시아 기대를 의식하고 예수도 생애 마지막에 혹시 고뇌했을지도 모르겠다.(Kremer, 198) 다윗의 아들 호칭은 메시아 호칭과 함께 유다교에서 흔히 이해한 것(루카 1,32; 9,20)과는 부활 이후 그 뜻이 크게 달라졌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주님이요 그리스도(사도행전 2,36), 하느님의 아들(로마 1,3)으로 사용되었다.  


유다인에게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출생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게 이 주제를 잘 해명해야만 했다. 그럼 지금 현대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이 문제는 중요한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 족보를 읽고 들으며 의아했을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초대교회가 당시 유다인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 족보를 들먹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바라는 메시아 모습에 어울리는 분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분, 평화통일을 원하는 분, 배척과 불평등을 반대하는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 어떨까. 우리 한국인에게 맞는 메시아로 예수를 소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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